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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Mr. 새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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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장 훈중앙일보 칼럼니스트·중앙대 교수

장 훈중앙일보 칼럼니스트·중앙대 교수

북핵 위기에 따른 안보 불안이 최고조로 치닫는 요즘,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가 연출 중인 혼란의 드라마를 거론하는 것이 한가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역사는 바깥 세계가 대변동기에 접어들수록 우리 안의 혁신과 응집력이 절실하다는 것을 가르쳐 왔다. 이 점에서 대선 패배, 제보 조작사건의 무책임을 뒤로한 채 당 대표에 재출마하겠다는 안철수 전 대표의 행보는 한때의 새 정치 아이콘의 실망스러운 변신쯤으로 보아 넘길 일은 아니다. 혼란스럽고도 무책임한 안 전 대표의 행보는 또 한 명의 기성 정치인의 탄생을 넘어서는 안타까운 사건이다. 그에게서 새 정치의 꿈을 봤던 젊은 층과 중도 유권자들의 꿈의 파산이고, 우리 정치가 혁신의 엔진을 다시 한번 잃게 된 사건이기도 하다.

안철수 혼돈의 결정적인 요인은 #스토리텔링의 실패에 있다 #당 대표 출마보다 배낭 하나 메고 #미국 실리콘밸리로 떠났다면 … #그가 기성 정치에 눌러앉기에는 #시민들의 새 정치 열망 너무 크다

의사 출신의 벤처기업가가 새 정치의 아이콘으로 홀연히 떠오를 수 있었던 시대적 배경, 그리고 안 전 대표가 혁신의 기운을 불어넣기보다는 점차 기성 정치를 닮아 간 복잡한 행로를 다시 돌아보자. 요즘 같은 대혼란의 시대에 우리에게 유일한 나침반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역사의 교훈일 터이기에. 먼저 지난 몇 년간 안철수 현상을 불러왔던 구조적 배경부터 되돌아보자.

정치학자들은 복잡한 사회일수록, 더 다양한 정치세력이 제도정치권에 포진해야 한다고 분석해 왔다. 계층 갈등, 종교 갈등, 세대 갈등, 지역 갈등과 같은 다양한 갈등구조가 얽히고설킨 사회는 그만큼 이를 수용하고 조정해야 하는 다양한 정치세력, 곧 다양한 정당을 필요로 한다고 비교정치학자들은 말해 왔다.

우리의 상황에 견줘 보면 민주화 이후의 해묵은 지역 갈등이 여전한 데다 경제 양극화에 따른 계층 갈등, 남북 문제를 둘러싼 이념 갈등, 그리고 요즘 심화되고 있는 세대 간 문화 갈등이 모두 정치적인 출구를 찾아 목소리를 높이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영남과 호남, 이념적 보수와 진보, 산업화 세대와 스마트폰 세대가, 그리고 수백만의 비정규직 종사자가 저마다 자신들의 가치와 이해관계를 대표해 줄 정치세력을 원하지만 정작 제도권 정치가 공급하는 대표 기능은 빈약하기 짝이 없다.

국회의석 100석 이상을 거느린 거대 정당(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이 둘씩이나 있지만 이들 거대 정당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은 넓고도 깊다. 지난겨울 기성 정당들이 우물쭈물 눈치를 보는 동안 현직 대통령의 즉각 퇴진과 사법적 책임을 물으려 주말마다 거리로 나섰던 것은 100만이 넘는 촛불시민이었다. 또한 정당정책이라는 측면에서도, 이미 화석화돼 버린 발전국가 시대의 국가주의 신화를 부둥켜안은 채 고립돼 가고 있는 한국당을 바라보는 중도보수 시민들의 심정은 착잡함 그 자체다. 10년 만에 여당으로 복귀한 민주당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여당이 추미애 대표 체제하에서 새 행정부와 빚어내는 뜬금없는 엇박자들은 지지자뿐만 아니라 시민들도 어리둥절케 하기에 충분하다.

그렇다면 민주당과 한국당이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새 정치의 요구는 한여름 불볕더위처럼 뜨거운데도 불구하고 안 전 대표는 왜 이러한 여망을 새로운 정치로 연결하는 데 실패해 왔는가? 경험의 부족, 결단력의 부족, 배려의 부족 등 여러 요인을 꼽을 수 있겠지만 필자는 안 전 대표가 혼돈을 보여 온 결정적 요인은 스토리텔링의 실패에 있다고 본다. 구체적으로 안 전 대표는 자신의 인생 스토리와 우리 정치 문제의 진단, 그리고 새로운 대안이라는 세 요소를 하나로 묶는 스토리텔링에 실패해 왔다. 사실 안철수 현상의 뿌리는 다 알다시피 컴퓨터 보안 전문 벤처기업인 안랩을 혁신적으로 키워 왔다는 데 있다. 무명의 의사가 수천억원대의 벤처기업을 일궜다는 것은 그가 우리 경제생태계와 사회의 온갖 문제를 온몸으로 경험해 왔음을 뜻한다.

이러한 개인적 경험은 우리 경제가 대기업 중심, 규제 중심의 발전국가로부터 벗어나 혁신경제, 상생경제(요즘 흔히 말하는 4차 산업혁명)로 나아가는 구체적이고도 생생한 대안으로 연결됐어야 했다. 이를 위해 행정부·국회·정당을 어떻게 파괴적으로 혁신할 것인지, 또한 발전국가 시대의 논리에 갇혀 있는 교육·노동·복지정책들을 어떻게 수술할 수 있는지를 설명했어야 했다. 하지만 총선과 대선을 거치면서 그의 정책과 언행은 점차 기성 정치권을 닮아 왔다. 어제의 출마 선언은 기성 정치 모방의 결정판이다. 출마 선언 대신 배낭 하나 메고 미국 실리콘밸리로 훌쩍 떠났다면 어땠을까? 안 전 대표가 이대로 기성 정치에 눌러앉기에는 시민들의 새 정치 열망이 아직도 푸르기만 하다.

장 훈 본사 칼럼니스트·중앙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