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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80년 서울의 봄(30)|10·26전야 반체제 운동|곳곳의 민주화물결 유신벽 허물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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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80년 서울의 봄은 군부의 전면등장과 함께 막을 내렸다.
당시 군은 그 춘내부사춘에 대해 사욕을 앞세운 정치인들의 분열과 사회혼란을 주된 이유로 제시했다.
이같은 군부의 주장이 타당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한갓 구실이었는지는 차지하더라도 한가지 확실한 것은 역사의 바늘을 후퇴시켰고 8년여가 지난 오늘 다시 한번 호된 진통을 겪게 했다는 점이다.
금년에도 우리는 민주화를 외치는 각종 시위의 연발속에 소위 6월 위기설을 경험했다.
80년 봄의 학원사태를 한마디로 규정해 말하기는 어렵다. 10·26후 학생운동은 상당기간 학원의 자유화 운동에 머물러 있었다. 학생들이 거리로 나온것은 10·26에서 반년이 지난 4월하순 부터다.
80년 봄 학생운동의 신호는 학원민주화를 위한 결의로 나타났다.『사회정의의 실현과 학원 민주화를 위해 싸워왔던 우리 서울대인은 최근 독재정권에 대한 역사의 준엄한 심판속에서 민주사회의 구현을 향한 민중의 의지가 구체화 되고 있음을 본다. 이제 민주화를 향한 역사의 거대한 흐름은 더 이상 지체 될수도 없고 지체되어서도 안된다고 확신하며 이를 저지하려는 어떠한 반동적 시도에도 결연히 투쟁할것을 다짐한다.

<긴급조치9호로 통치>
우리는 역사앞에서 책임을 다했던 선배·동료학우들의 투쟁을 바탕으로 학원민주화에 앞장 설것을 선언하면서 80년 2월5일 인문대 학생총회를 필두로 2월11일까지 계속되었던 10개 단과대학 학생총회에서 결의된 내용을 결집, 학도호국단의 철폐 및 학생회 부활에 관한 우리의 입장을 천명하는 바이다. …대학은 이제 재생하여야 한다. 대학의 구성원인 교수·학생은 상호간의 굳은 신뢰와 연대의식을 바탕으로 학원의 민주화를 달성하고 나아가 민중이 주체가되는 통일민족국가 구현에 헌신할 것을 다짐하자』 그 해 2월12일 서울대학교내 각 대학 학생총회 공동명의로 발표된 성명이다. 2월22일엔 서울시내 대학들이 같은 취지에 연대하면서 학원엔 민주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이것은 유신 체제하에 억눌려온 학생조직의 부활을 의미했다.
학원내 학생 서클은 유신체제하에서 엄격히 통제 당했다.
1975년5월13일, 박정희대통령은 긴급조치 9호를 공포했다.
유신으로 절대권력을 장악한 듯 싶었던 박대통령이 학생·종교인·노동자·지식인동의 끈질기고 집요한 저항이 계속되자 「긴급조치」 라는 보도를 다시 꺼내든 것이었다. 이후 박대통령이 저격된 뒤인 79년12월8일 그것이 해제되기까지 긴급조치 9호는 우리사회를 지배하는 지고의 율법이 됐다.
긴급조치9호는 실로 가공할만한 포괄적인 내용을 담고있었다. △유언비어의 날조·유포·사실왜곡 전파행위 △집회·시위 또는 신문·방송·통신등에 의해 헌법을 부정하거나 폐지를 청원·선전하는 행위 △수업·연구 또는 사전허가를 얻은 것을 제외한 집회·시위 또는 정치간여 행위가 규제됨은 물론 △이상의 조치에 대한 비방과 △이런 금지사항을 위반한 내용을 방송·보도, 기타의 방법으로 전파하거나 그런 내용의 표현물을 제작·소지하는 행위도 금지됐다.
동시에 △주무장관에게는 이 조치의 위반자나 위반당시의 소속학교·단체·사업체등에 대해제 적·휴교·폐간· 면허 취소등을 취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지는 한편 △이런 명령이나 조치는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못박았으며 체제에 관한 여하한 형태의 반대의사나 행동은 1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도록 했다.
아울러 이를 뒷받침할 각종 입법과 조치가 잇달았다.
언론과 야당· 종교계등 제비만 세력이 긴급조치로 손발이 묶인 가운데 반정부운동의 진원지였던 대학가에 대해서는 갖가지 규제장치가 마련 시행됐다.
학도호국단 설치령에 따라 자율적 학생회가 해체되고 학교당국이 학생간부를 임명했으며 학내 서클의 외부와의 관계도 차단됐다.
또 지도 교수제를 만들어 교수들이 연대책임을 지게했고 문제학생을 강제로 휴학시킬수 있는 지도 휴학제가 나오는가 하면 교수재임용제를 실시, 문제 교수들의 축출작업도 병행됐다.
사실 연구를 게을리하는 일부 교수들의 각성을 촉구하고 대학의 질을 높일 제도적 장치가 될수도 있던 재임용제는 정치도구로 전락되면서 악법의 본보기로 매도됐다.
긴급조치9호를 포함한 각종 규제장치하에서 반정부 비판세력은 한동안 침묵했다.
긴급조치9호가 가한 충격과 압력은 너무나 크고 깊었기에 반정부세력이 이를 극복하고 힘을 재결집하는데는 상당기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속에서 소수학생들에 의한 몇차례의 시위 기도와 지하유인물 배포가 계속되었지만 언론보도 자체가 금지되는 통에 희생자만 냈을 뿐 세간에는 알려지지도 않은채 묻혀 버렸다.

<야당이 이긴 12·12총선>
그러나 이름그대로 한시적·임시적이어야할 「긴급조치」가 4년6개월여를 끌면서 그 엄청난 위력은 만성화속에 퇴색돼갔고 유신정권에 대한 국민의 신망만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특히 이 조치에 의해 각계인사 8백여명이 구속기소되는등 피해쪽의 확대는 저항의 밀도와 열기를 더하게 했다.
일시 주춤했던 운동세력은 77년 들어 대학생과 교회를 선두로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으며 인권외교를 내세운 미 「카터」 행정부가 이들의 활성화를 가속시키는 촉매역할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노동자·농민의 문제가 정치 이슈화되고 직접행동으로 표면화되면서 활력을 불어넣었다.
「학원-종교계」를 축으로 한 지식인 중심의 민주화 운동에 노동자·농민이 가세함으로써 본격적인「민중운동」 이 전개된 것이다.
이런 가운데 77년12월29일 인권운동협의회, 78년7월5일 민주주의 국민연합이 결성되고 유신체제에 대한 새로운 거센 도전과 저항운동은 78년12월12일의 10대 총선에서 야당인 신민당의 총 득표율이 여당인 공화당을 앞서는 결과를 낳았다.
공화당의 총 득표율이 31.7%였던데 비해 신민당은 32.8%를 얻어 1.1%를 앞질렀다. 유신체제에 대한 국민의 뜻이 단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총선거의 여세를 몰아 출범한 김영삼체제의 신민당은 적극적이고 격렬한 대정부·여당 투쟁에 나섰고 재야세력과 연계하면서 정국을 긴장상태로 몰고갔다.
윤보선·함석헌·김대중씨를 공동의장으로한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이 79년3월1일 발족되면서 야당과 재야의 연합운동은 한층 고조돼갔다.
그렇다고 해서 세인들이 절실하게 느낄만큼 눈에 띄게 투쟁이 두드러졌던 것은 아니다. 이는 운동의 양태를 적나라하게 알려줄 언론매체의 위축이 한 이유는 되겠으나 실제 가시적 운동도 정부·여당의 조직적· 위압적 사전봉쇄에 의해 차단됐기 때문이었다.
유신체제가 종말을 고한 79년 초반만 하더라도 대대적인 유통세력의 시위는 없었다. 그저 신념에 찬 일부 인사들의 외로운 외침과 그들에 대한 권력쪽의 거칠고도 조직적인 대응만이 계속됐을 따름이다.
대표적 운동세력의 하나인 한국기독교문제연구원이 작성한 당시의 민주화운동일지도 이런 상황을 잘 말해주고 있다.
△1월4일=대구교도소 수감 양심범 80명, 수감자 구타중지등 20개 사항 내걸고 12일간 단식.
△1월9일=「동아투위소식」문제로 관련자 3명 구속.
△1월11일=원주·전주 가톨릭 문화관에서 「김지하 문학의 밤」개최.
△1월12일=78년10월27일 광화문 데모사건 관련 학생4명, 재판거부·연기.
△1월15일=양심범 가족협의회의, 교도소의 인권유린 사태에 항의, 19일까지 농성.
△1월30일=기독청년 협의회, 재소자 인권실태 공청회 개최.
△2월5일=광주 YMCA 강당서 구속문인의 밤 개최.
△2월6일=자유실천문인협의회, 인천서 「김지하 문학의 밤」개최, 학생등 1천여명 참석.(이어 대구· 마산· 부산· 대전· 청주· 목포· 서울등 13회에 걸쳐 개최) △2월9일=긴급조치 위반학생들,「번역문제 대책위원회」결성하고 석방학생들에 대한 보복적 징집조치에 항의성명서 발표.
△2월10일=김대중씨, 검찰에 출두하여 형집행정지 출소이후의 행적에 대해 조사 받음.
△2월24일=고대 지하신문사건. 고대생 5명이 신문에 보도안된 중요사건을 프린트하여 재학생 2백50명에게 발송한 혐의로 구속.
△2월25일=동일방직사건 1주년 모임이 경찰에 의해 강제해산.
이상이 「국민연합」 결성이전의 79년 주요사항으로 언론의 보도없이 사장될수 밖에 없었던 그런 운동들이었다.
이후에도 상황은 별다를게 없었다. 그만큼 정부·여당의 대응은 강도를 더해갔다.

<강경도전 강경응전>
민주청년협의회·기독청년협의회·NCC인권위원회·양심범가족협의회·병역문제대책위원회·자유실천문인협의회· 가톨릭 농민회 및 교도소 수감 학생등에 의한 저항운동이 거듭되었을 뿐 이렇다할 움직임은 없었다.
4월15일 각 대학 연합데모를 모의했다는 혐의로 대학생 5명이 구속되는 「민주 구국학생연맹 사건」 이 대학가에서 눈에 띄었을 정도였고 이따금씩 들려오는 긴급조치 위반 학생등의 가석방조치 소식이 고작이었다.
유신이 종언을 고한것은 물론 박정희대통령이라는 절대권력자의 죽음에 직접적으로 기인한다. 그러나 반대세력의 끈질기고도 거센 저항운동이 그 바탕이 되었음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고 그러한 저항운동의 가까운 상징은 이 YH사건과 부마사태였다.
8월9일 YH무역 여성근로자 1백72명이 신민당사에서 회사정상화와 근로자 생존권보장을 요구하며 농성에 돌입했다. 경직될대로 경직돼있던 말기의 유신정권은 11일 경찰을 동원, 농성여공들을 끌어냈고 강제해산의 와중에서 여공 여경숙양이 숨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신민당 의원들의 항의농성→신민당총재단에 대해 직무집행 정지 가처분 결정 (9월8일) 과 김영삼총재의 총재직 박탈→김총재의 의원직 제명(10월4일)→신민당의원의 의원 총 사퇴(10월13일) 등 강경 일변도의 도전과 응전이 되풀이 되면서 사태는 막바지로 치달았다.
YH사건으로 한여름 정국이 한층 가열되고 2학기가 시작됐을 때 대정부 첫포문을 연것은 강원대생들이었다..
9월3일 낮12시30분쯤 선언문과 결의문 1천 여장이 강원대 캠퍼스에 뿌려졌다. 학생회관에 모인 8백여 학생들은 결의문 낭독 후 교외진출을 기도했으나 경찰에 저지 당하자 교내에서 2시간여 농성을 벌였다.
『독재정권 물러나라』 『YH사태를 규탄한다』 는 등의 구호를 외치던 학생중 6명이 구속된 강원대생 데모에 이어 4일에는 대구시내 계명대·영남대·경북대등 3개대학 연합 시위가 벌어졌다. 「이 어두운 역사의 조타수가 되지못한다면」 이란 제하의 「사회정의구현을 위한 경북학생협의회」 명의 선언문을 동시에 낭독한 3개 대학생들은 시위에 돌입했다.
교내에서 시위를 벌이던 2천여 계명대생들은 대구시내로 진출, 경찰과 투석전을 벌였고 일부는 신민당 경북도지부 사무실로 옮겨 농성을 벌였다.
영남대생들은 선언문 살포 후 성토대회를 기도했으나 강제 해산됐고 일부 경북대생들도 선언문을 낭독하려다 연행돼 4명이 구속됐다.
1학기를 비교적 조용히 지난 듯 했던 대학가에 시위의 봇물이 터진 것이다.
9월20일 하오1시부터 3시간여 산발적으로 전개된 서울대생 데모에서는 「민족민주선언」 「학원민주선언」 「경제시국선언」 등 3개의 선언문이 발표됐고 관악캠퍼스는 최루탄가스와 돌로 뒤덮였다.
박정권을 반역사적·반민족적 매판정권이라고 규정하면서 △유신헌법·긴급조치 철폐 △독재정권하야 △노동 3권 부활 △구속인사 석방 및 복권 복학 보장등을 외친 학생 70여명이 연행되고 이중 5명이 구속됐다.
언론을 향한 구호도 바뀌어 78년까지의 『언론인은 각성하라』 에서『자폭하라』로 극렬화해가고 있었다.
76년 박대통령 허수아비화 형식이 학원가에 첫선을 보인 이래 학생들의 고조된 분노를 다시 확인하는 순간들이었다.
거리낄게 없는 정면 도전의 구호·투쟁현상들이 나타났다.
9월18일에는 경희대 유인물사건으로 2명이 구속됐고, 고대에서는 구국선언문 사건으로 2명이 구속됐다.
9월20일 서울대 데모가 재개됐다. 경찰은 교내에 대기중인 기동병력을 풀어 초동진압에 나섰다. 최루탄에 맞선 학생들은 투석과 소방호스등을 동원, 3시간여 동안 게릴라식 데모를 전개했다.

<고·연전 폐지론까지>
다음날에도 같은 내용· 방식의 데모가 전날의 결의에 따라 잇달았다.
서울대생 데모는 9월26일 이대생 데모로 파급됐다. 3천여명의 이대생들은 「이화민주선언」을 발표했다.
또한 9월26일과 27일에는 연고전을 이용한 연대생과 고대생들의 시위가 벌어졌다. 연고전 폐지론이 정부·여당 인사들에게서 거론되기까지 했다.
정부·여당이 서울의 소요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을 즈음 부산대 구내에 민주선언문이 살포됐다.
유신에 치명타를 가한 부마사태의 신호였다.
대학가에서는 늘 볼 수 있는 선언문이었기에 관계기관의 전문가들이 새삼 긴장할 일은 아니었다.
누구도 이날의 선언문이 유신의 명운을 결정적으로 재촉하는 것이 될 줄은 알아채지 못했다.
16일 상오10시, 도서관앞에 모이기 시작한 부산대생들은 불과 20여분 후 5천여명으로 불어났다. 경찰의 저지망을 뚫고 삼삼오오 시내로 진출한 학생들은 광복동·남포동등 시내 중심가로 집결했다.
애국가를 부르며 산발적인 시위를 벌이면서 경찰과 대치하던 학생들의 수는 동아대생의 합세로 3천여명으로 불어났고 일부이긴 했지만 부산거리는 폭동상태가 됐다.
17일 하오4시 부산 중심가에서 다시 시작된 부산사태는 마산사태로 확산됐고 이 사태가 다시 전국사태로 확산될지 모른다는 우려가 있었다. 10·26사태는 그런 급박한 상황의 일보전이라고들 했다. 10·26후 계엄당국의 우려는 여기에 근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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