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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과 비용을 맞바꾸지 마라".. 드러나는 그렌펠 참사 주범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난 6월 화염에 휩싸인 영국 런던의 임대아파트 그렌펠 타워 모습.약 15분 만에 24층 건물 전체가 불타버렸다. [AFP=연합뉴스]

지난 6월 화염에 휩싸인 영국 런던의 임대아파트 그렌펠 타워 모습.약 15분 만에 24층 건물 전체가 불타버렸다. [AFP=연합뉴스]

 "안전과 비용을 맞바꾸지 마라."
 지난 6월 14일(현지시간) 벌어진 영국 런던 그렌펠타워 참사는 대도시 어디서건 발생할수 있는 인재(人災)였음이 드러나고 있다. 당국의 규제는 치밀하지 못했고, 건물 관리자는 비용절감에 매달렸다. 개보수를 맡은 건설사는 권장 기준을 외면했다. 120가구 600명 주민의 안전보다 비용을 우선시했던 선택이 최소 80명의 목숨을 앗아간 것이다.

80명 목숨 앗아간 화재 주원인은 값싼 클래딩 #'높이 10m 이하 용도' 패널 24층 건물에 부착 #준공 40년 넘은 임대주택 냉난방 개선 목적 #단열 및 내구성 높아 가연성 위험 경시한 듯 #연소성 테스트, 실제 안전진단과 따로 놀아 #정부 "고층빌딩 새 안전기준 마련하겠다"

참사 직후 알려진 바와 같이 불은 4층 입주민의 냉장고에서 발화돼 건물 외장재를 타고 24층 꼭대기까지 번지면서 빌딩을 삼켰다. 불길이 건물 전체로 번지는 데는 불과 15분 밖에 걸리지 않았다.  화재경보기 미작동, 스프링클러 부재 등 여러 이유가 복합됐지만 화마(火魔)가 삽시간에 건물 전체를 삼킨 주 원인으론 건물 외관에 부착된 마감재(클래딩)가 지목돼 왔다. 경찰 조사가 진행 중이긴 하나 현재까지 확인된 바로 이 클래딩은 불법적이거나 함량 미달 제품이 아니라 관계당국의 가연성 테스트까지 통과한 제품이었다.
 비극은 이 제품이 24층 건물 전체에 쓰이게 된 과정 자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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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그렌펠: 주택 재난의 해부’ 등의 연속 기사를 통해 문제의 클래딩이 이 임대주택 타워에 쓰이게 된 경로를 짚었다. 알루미늄 철판과 가연성 폴리틸렌으로 이뤄진 이 클래딩은 미국 회사 아코닉 제품이다. 아코닉은 클래딩을 3가지 버전으로 생산하는데 그렌펠타워에 쓰인 레이노본드 PE 패널은 높이 10m 이하 건물용 권장 제품이다. 제품 안내 브로셔에는 “소방관 사다리가 닿을 수 있는 최고 높이 이기 때문”이라는 설명까지 붙었다.  그러나 이 권장은 현장에서 지켜지지 않았다.

총 24층인 그렌펠타워는 높이가 67m에 이른다. 업체 측은 사건 이후 “앞으론 해당 제품을 40피트(약 12m) 이상 건물 용도로 팔지 않겠다”고 발표하면서도 “(그렌펠에 쓰일 당시) 제품이 영국 건축물 규정과 배치되지 않았다”고 볼멘 소리를 냈다. 실제로 이 클래딩은 건축 자재를 승인하는 영국 아그레망 위원회에서 화재 저항력이 있다는 의미의 ‘클래스 0’ 등급 충족 판정을 받았다.

 그렇지만 정작 잉글랜드의 화재안전법에 해당하는 ‘2010 건물 규정’의 섹션 B는 “빌딩의 외관 벽은 화재 확산을 적절히 저항할 수 있어야 한다”고 돼있을 뿐 구체적인 규정이 마련돼있지 않았다.

 실제로 미국 등 여러 국가에선 몇 번의 화재를 겪은 뒤 레이노본드 PE 패널 타입의 클래딩 설치를 금지하고 있다. 영국 내에서도 스코틀랜드는 1999년 어바인 자치구 소유 타워 블록 화재 때 외벽 마감재가 불길 확산의 원인으로 지목된 후 규정을 한층 강화했다.

 주목할 점은 이 클래딩이 ‘제한된 비용 안에서의 단열 강화’ 목적으로 선택됐다는 사실이다.
그렌펠타워는 1974년 지어진 임대타워로 건물 노후화에 따른 냉난방 효율 저화로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새 단열과 이중창을 설치하는 계획안이 마련됐고 세입자를 대변하는 켄싱턴&첼시 세입자 관리조합이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2014년 입찰에서 1100만 파운드를 부른 프랑스 업체를 누르고 영국 건설업체 라이돈이 870만 파운드에 수주했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FT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비용 절감이 발생했고 클래딩도 좀 더 싼 제품으로 대체됐다. 하지만 이 정도의 비용 절감은 비일비재하다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라이돈의 하청업체인 할리 파사드가 아코닉사의 클래딩을 선택한 것은 단열내구성이 뛰어나다는 점 때문이었다. 게다가 18m 이상 건물에 적용되는 연소성 테스트도 통과한 제품이었다. “그렌펠의 재단장은 세입자의 삶을 개선시키려는 의도였지 비극을 초래하려는 건 아니었다”고 FT는 진단했다.

그럼에도 의혹은 남아 있다. 예컨대 친환경 건축인증 민간기구 BRE(British Research Establishment)가 시행하는 이 연소성 테스트가 실제 화재상황을 제대로 반영했는가 하는 점이다. 전문가들은 클래딩을 단독으로 태웠을 때와 그렌펠타워 경우처럼 단열재와 함께 외벽에 부착했을 때 차이가 있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마감재와 단열재 사이에 방습을 위해 마련된 미세한 간격이 화재시에 일종의 ‘굴뚝’ 역할을 해 불을 번지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방재전문가는 그렌펠 화재에서 “이 틈이 바람길 역할을 하면서 내부의 가연성 물질을 태웠을 수 있다”고 진단했다. 실제로 사건 발생 후 정부가 75개 고층건물에 대해 외장재 화재 안전 점검을 실시한 결과 안전 합격을 받은 곳은 한군데도 없었다.

영국의 건축 규정은 수십년간 내구성을 강조해왔다. 이 과정에서 건설업자들의 가연성에 대한 인식이 둔해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FT는 지적한다. 한 전문가는 FT에 “샤드(런던의 대표적인 고층빌딩)같은 환상적인 빌딩들은 현재의 규정 때문에 가능했다. 보다 예방적이고 보수적인 규정이었다면 샤드는 세워질 수 없었을 것”이라며 영국의 느슨한 건축규정을 비꼬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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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지드 자비드 영국 지역사회부 장관은 지난 21일 앞으로 고층빌딩에 대한 새로운 화재 안전 기준을 마련해 테스트를 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기존 노후 건물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불안감은 사그러들지 않고 있다.

런던 북부 캠든 지역의 찰코츠 에스테이트(임대주택단지)도 그런 사례다. 안전 진단이 끝났음에도 인근 호텔에서 임시 거주해온 주민들이 집으로 되돌아가려 하지 않는다고 일간지 가디언은 보도했다. 찰코츠는 그렌펠 타워와 비슷한 클래딩을 썼다는 지적이 나온 건물로 1차적으로 방화문 보강 등이 이뤄졌지만 외장재 보완은 2차 과제로 남았다. 한 세입자는 “아내와 침대에서 화염에 휩싸여 죽고 싶지 않다”며 “안전이 보장되지 않으면 돌아갈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렌펠 참사는 영국 사회 전반에 한층 높아진 안전 기준을 요구하고 있다. 테리사 메이 정부는 “사회 주택(social housing·일종의 공공임대주택)도 버킹엄궁과 같은 기준으로 지어져야 한다. 거주민에 따라 다른 (안전) 단계가 있어선 안 된다”는 성난 목소리에 답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됐다. 이 문제는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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