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섬', '토끼섬'이 어딘가요?…해경이 '토속 지명' 넣은 지도 만든 사연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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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13일 오후 4시29분쯤 119 상황실. 50대 여성 2명이 다급한 목소리로 신고 전화를 했다. 이들은 "인천 영흥도 갯벌에서 조개를 캐던 중 갑자기 물이 들어와 '불섬'에 고립돼 있다. 살려달라"고 요청했다. 신고를 받은 상황실 직원은 순간 당황했다. 지도 어디에도 '불섬'이라는 지명이 없었다.

다급한 상황에 엉뚱한 지명 신고해 골든타임 놓칠까봐 #평택해경, 최근 토속지명 포함한 해양 안내 지도 제작 #낯선 토속 지명으로 구조가 지체되는 등 문제 예방 위해 #주민들이 주로 사용하는 섬·암초·갯바위·해안가 등 136개 지명 포함 #해경 뿐아니라 민간해양구조선 등 유관기관에도 전파할 예정

이 신고를 전달받은 경기 평택해양경비안전서(평택해경) 상황실도 난감하긴 마찬가지였다. 재차 신고한 여성들에게 전화를 걸어 위치를 물었지만, 이들은 "서울에서 와서 섬 위치를 잘 모른다. 주민들이 불섬이라고 불렀다"고 했다.
결국 해경은 대부해양경비안전센터로 "불섬을 아느냐"고 물었다.

평택해경 상황실 직원들이 전래·토속 명칭이 포함된 안내도를 소개하고 있다. [사진 평택해경]

평택해경 상황실 직원들이 전래·토속 명칭이 포함된 안내도를 소개하고 있다. [사진 평택해경]

확인 결과 '불섬'은 인천시 옹진군 영흥면에 있는 '목섬(또는 항도)'을 주민들이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이었다. 목적지를 파악한 해경은 현장으로 달려가 이들을 구했다. 하지만 평소 구조시간보다 10분이나 지체됐다.

평택해경이 주민들이 사용하는 토속 지명을 담은 안내도를 제작했다.
평택해경은 25일 지역 주민들이 널리 사용하는 해안가 토속 지명을 담은 '치안 분석 및 토속 지명 안내도'를 자체 제작해 인명 구조에 활용하고 있다고 밝혔다.
해도나 지도에 표시되지 않은 섬이나 암초·갯바위·해안가 등 136곳을 파악해 지역주민들이 부르는 전래·토속명칭을 넣어 만들었다.
지역 주민이 부르는 전래 지명이 해도나 지도에 나와 있는 이름과 다르거나 없는 경우가 많아 자칫 구조 골든타임을 놓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실제로 평택당진항 서부두 앞에 있는 암초의 정식 명칭은 '영암'이지만 주민들은 '영웅바위'라고 부른다.
경기 화성시 우정읍 국화도 인근에 있는 '매박섬'은 예전에 토끼를 방목했다고 해서 주민들 사이에선 '토끼섬'으로 불린다.
충남 서산시 대산면에 있는 '흑어도'는 검은 우럭이 많이 잡힌다고 해서 '먹어섬', '모개섬' 등으로도 다양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평택해경이 자체 제작한 토속 명칭이 포함된 안내지도 [사진 평택해경]

평택해경이 자체 제작한 토속 명칭이 포함된 안내지도 [사진 평택해경]

문제는 주민들은 해경 등에 신고를 할 때 자신들만 아는 전래·토속 명칭으로 신고를 하는 일이 잦다는 것이다.
반면 상황실에 근무하는 경찰관은 주민들이 말하는 지명을 알지 못해 재차 확인을 하고 해도와 지도를 대조하느라 구조 시간이 지체되는 일이 벌어진다.

이에 해경은 전래·토속지명 파악에 나섰다. 일선에서 근무하는 각 해양경비안전센터 직원들에게 묻고 주민들을 만나 지명을 확인했다.
이렇게 모은 정보를 평택해경 5개 안전센터(평택·안산·대부·당진·대산)의 관리 지역으로 분리해 자세하게 지역 전래 지명을 표시했다. 사고 다발 지역 및 위험 구역도 함께 표기했다.

[자료 평택해경]

[자료 평택해경]

평택해경은 이 안내도를 각 안전센터와 경비함정에 배포해 현장 사고 대응에 활용하도록 할 방침이다. 또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전래·토속 지명을 파악해 개정·보완할 예정이다.
해상교통관제센터(평택·대산)나 민간해양구조선에도 안내서를 배포하기로 했다.
평택해경 상황실 박종현 경위는 "주민들이 자신들만 알고 있는 전래 지명으로 신고를 해 난감했던 경우가 한 두번이 아니었다"며 "전래·토속 명칭을 모은 안내도가 도입된 후부터는 신속한 위치 파악이 가능해 졌다"고 말했다.
평택=최모란 기자 mor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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