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 손해 끼칠 뻔한 기업인...배임죄 유죄일까, 아닐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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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의 대표이사가 자신의 임무를 어겨서 회사에 손해를 끼치면 배임죄로 처벌받는다. 그런데, 그럴 위험성이 있는 행위는 했지만 실제 손해는 발생하지는 않았다면. 대표이사는 죄를 지은 것일까, 아닐까.

전원합의체 격론...8:4로 판례 소폭 변경 #"손해발생 위험만으로 충분" 해석은 유지 #"구체적 위험 아닐 땐 배임미수 적용해야" #"판례 변경 문턱서 멈췄다"는 평가도

이같은 의문은 기업인들이 ‘업무상 배임’혐의로 법정에 설 때마다 논란이 되는 주제였다. 학계와 법조계가 다수설과 소수설로 나뉘었다.

20일 열린 대법원 전원합의체 현장. 업무상 배임의 인정 범위를 두고 재판장인 양승태 대법원장과 주심인 김신 대법관의 의견마저 갈렸다. 

20일 열린 대법원 전원합의체 현장. 업무상 배임의 인정 범위를 두고 재판장인 양승태 대법원장과 주심인 김신 대법관의 의견마저 갈렸다. 

지난해 특별사면으로 풀려난 CJ그룹 이재현 회장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 회장의 배임 혐의의 핵심은 일본에 세운 개인 회사인 '팬 재팬' 명의로 건물을 사들이기 위해 돈을 빌리면서 CJ재팬이 연대보증을 서게 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건물 매입 후 채무는 정상적으로 상환돼 CJ재팬이 빚을 갚는 일은 없었다.

이같은 논란은 형법상 문구의 해석에 견해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배임죄를 규정한 형법상 문구는 실제로 손실이 발생하는 결과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처럼 읽히지만 그동안 대법원은 ”현실적인 손해가 발생한 경우뿐만 아니라 재산상 실해 발생의 위험을 초래한 경우”에도 ‘기수범’으로 처벌하는 범죄(위험범)로 해석해 왔다.

지난달 전원합의체로 넘긴 뒤 한 달 만에 판례 변경 

대법원은 지난달 19일 이 문제를 전원합의체로 끌어올렸고, 20일 결론을 내렸다.

이번 판결은 중소기업인 김모(57)씨에 대한 것이다. 그는 2006년 3월 중소기업 J사와 K사 등의 대표이사였다. J사에 필요한 사업자금 23억원을 S저축은행으로부터 빌리면서 S저축은행이 담보를 요구하자 K사를 연대보증인으로 내세웠다. K사 명의로 29억9000만원의 약속어음을 발행해 줬다.

검찰은 김씨의 행위로 K사가 손해를 입게 됐다고 보고 업무상 배임(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위반) 혐의를 적용해 2013년 1월 기소했다.

문제는 K사에게 실제로 손해가 생기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어음 발행이 대표이사 권한을 남용한 행위였고 S저축은행도 그 사정을 잘 알고 있어서 무효인데다, 다른 사람에게 유통된 적이 없어서 K사가 실제 어음금을 지급해야 할 걱정이 없었다.

그러나 1ㆍ2심은 유죄 판결을 내렸다.

약속어음은 일단 발행되면 유통 가능성이 생기고 유통되면 K사는 어음 발행 과정의 하자가 있었더라도 어음 소지자에게 채무를 부담한다는 이유였다.

1·2심 법원은 ‘현실적인 손해가 발생한 경우 뿐만 아니라 재산상 실해 발생의 위험을 초래한 경우’도 처벌한다는 종례 판례와 어음의 유통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김씨는 K사에 재산상 손해가 발생할 위험을 초래했다”고 판단했다.

"배임죄 아닌 배임미수죄 적용해야"

이 사건의 상고심에서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김신 대법관)는 이날 김씨에게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던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김씨에게는 배임죄가 아니라 배임미수죄만을 적용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배임죄에는 "미수범도 처벌한다"는 규정이 있지만 그동안 손해 발생의 위험만 있어도 '기수'로 처벌하다보니 실제 재판에서 배임미수로 유죄 판결이 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배임죄 해석에 근본적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판례 근본적 재검토"vs"뿌리는 유지"…격론 벌여

'배임미수'라는 결론에는 재판관 전원이 동의했지만 그 이유를 둘러싸고 벌인 치열한 논쟁의 흔적이 판결문에 그대로 남았다. ‘다수의견’(양승태 대법원장 등 8인)과 ‘별개의견’(주심 김신 대법관 등 4인)으로 갈라졌고 조희대ㆍ김재형ㆍ박상옥 대법관은 다수의견에 보충의견을, 김신ㆍ김창석 대법관은 별개의견에 보충의견을 달기까지 했다.

다수의견은 “약속어음이 실제로 제3자에게 유통되기 전까지는 아직 구체화되거나 현실화됐다고 보기 어려우므로 이를 가지고 배임죄의 재산상 손해 요건에 해당하는 실해(실제 손해) 발생의 위험이 초래됐다고 평가할 수 없다”고 배임미수로 본 이유를 설명했다.

손해발생의 위험만으로도 처벌한다는 기존 배임죄 해석의 뿌리는 그대로 둔 채 어음이 문제가 된 배임죄의 경우에는 어음 발행 과정에 하자가 있어 무효이고 3자에게 유통되지도 않았다면 미수에 그친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게 다수의견의 결론이다.

배임 횡령 사건 1심 무죄율.  [자료제공=법원 사법연감]

배임 횡령 사건 1심 무죄율. [자료제공=법원 사법연감]

그러나 별개의견은  “배임죄는 위험범이 아니라 침해범으로 보아야 한다”며 '근본적 재검토'를 주장했다. 실제로 손해발생이라는 결과가 발생했을 때만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별개의견은 “(형법 문구인)‘손해를 가한 때’란 그 문언상 ‘손해를 현실적으로 발생하게 한 때’를 의미한다”며 “문언해석의 범위를 벗어나 형벌규정의 의미를 피고인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확장 해석하는 것은 죄형법정주의 원칙에 반한다”고 했다.

별개의견은 “그동안 배임죄에 관해 사적자치의 영역에 형사법이 과도하게 개입하는 결과를 초래한다거나 민사사건의 형사사건화를 초래할 수 있다는 등의 비판이 지속적으로 제기돼 왔다”며 “종래 판례는 근본적으로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법조계 "기교적 결론" 비판도

이에 대해 다수의견에 선 김재형ㆍ조희대 대법관은 “채무 부담 등으로 회사의 전체적 재산가치의 감소했다면 재산상 손해를 가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반박했다. 이들은 또 “별개의견처럼 해석하면 현재 배임죄의 기수로 인정되고 있는 많은 사안이 배임미수죄로 처벌될 수 있을 뿐이어서 재산 범죄로서의 배임죄의 규범력이 크게 훼손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같은 결론에 대해 한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는 "기업에 대한 경영자들의 배신적 행위가 여전히 많은 현실을 고려해 다수의견이 다소 기교적 결론을 낸 것 같다"고 지적했다. 그는 "근본적 판례 변경의 문턱까지 갔다가 '배임죄'의 그물코를 조금 넓히는 정도에 그쳤다"고 평가했다.

임장혁 기자 im.janghyu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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