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전조→당ㆍ정의 총대'로 이어진 증세 논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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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은 20일 “재정의 역할에 대한 인식을 바꿔야 할 때”며 “그동안 작은 정부가 좋다는 맹목적인 믿음이 있었지만, 저상장·양극화의 구조적 한계를 극복하고 국민의 삶을 실질적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재정이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정부는 작은 정부가 아니라 국민이 필요로 하는 일을 하는 정부를 지향한다”며 “재정이 이러한 정부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해 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이날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의 모두 발언이다. 적극적인 재정의 전제는 세금을 더 걷어야 가능하다는 게 여권의 진단이다. 문 대통령은 다만 “적극적 재정정책은 반드시 강도 높은 재정개혁과 함께 가야 한다. 예산의 제약 때문에 우선순위를 정해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한다”며 직접적으로 증세를 언급하진 않았다.

하지만 회의가 비공개로 된 뒤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고소득·대기업 증세를 요구했다. “재원 조달 측면에서 좀더 적극적으로 해야하는데 지금이 적기다. 대통령 지지율이 높으니까 이때 대기업 과세를 정상화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의 발언도 했다고 한다. 김태년 정책위의장은 이와 관련, “사전에 나와 논의한 내용”이라고 전했다. 국정기획위 경제2분과 위원이자 당 대표 비서실장인 김정우 의원도 “국정기획자문위가 증세가 불필요하다고 판단했지만 위원회 내부에서도 지금이 적기란 지적도 많았다”며 “그래서 선택의 문제다”라고 전했다. 당을 중심으로 여권 내에 공감대가 있었다는 얘기다.

당의 요구에 문 대통령은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윤영찬 국민소통수석 명의의 서면 브리핑을 통해 “세제개편에 대해 논의해보겠다”는 입장을 냈다. 여권 관계자는 “문 대통령 역시 사실 세제개편 요구에 대해 긍정적인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이라며 이날 분위기를 전했다.

이날 회의에 대통령과 여당 지도부가 참석한 걸 두고 청와대는 “이례적”이라고 했었다. 이 때문에 여권에선 “회의의 참석 범위와 모두 발언을 통한 문 대통령의 입장 발표, 그리고 여당 대표가 총대를 매는 구조로 이어진 이날 하루의 과정이 맞물려 돌아갔다”는 말이 나왔다. 사실상 증세에 대한 청와대의 부담을 당과 정부가 덜어주는 ‘잘 짜여진 각본’이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김태년 정책위의장은 “조만간 (내년도 예산안을 위한) 세법 개정안을 확정해야 하니까 이번 여름에 바로 진도나간다고 보면 된다”고 했다.

김형구·강태화 기자 th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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