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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권위의 망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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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한 남자와 다섯 학급-. 남자는 서로 격리된 각 학급에 다른 직함으로 소개됐다. 학부생.대학원생.시간강사.전임강사.정교수 등. 이후 각 학급에 "남자의 신장(身長)을 가늠해보라"는 주문이 떨어졌다. 취합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사회적 지위가 높아짐에 따라 키가 커졌다. 같은 사람인 데도 '정교수'가 '학생'에 비해 무려 평균 5㎝ 크다고 답했다."

"사람들은 어처구니없는 권위에도 의외로 쉽게 복종한다." 미국 심리학자인 로버트 치알디니는 자신의 저서 '설득의 심리학'에서 실험 사례를 제시하며 이렇게 주장했다. 사례에서 교수 직함은 사회심리학에서 말하는 '권위의 망토'의 일종이다.

실체나 진실이 아니더라도 이를 걸친 자에게 사람들은 고개를 숙인다는 것이다. 망토는 종종 지능적인 사기꾼의 도구로 쓰인다. 요즘 발생한 큰 사기 행각에는 명성.직함.정치권력 같은 권위의 망토가 어김없이 등장했다.

미국에선 '피싱(phishing)'이라는 신종 사기가 한창이다. 낚시(fishing)와 개인정보(private data)의 합성어로 '개인 정보를 낚는다'는 뜻이다. 해커들은 시티그룹 같은 대기업의 로고가 들어간 e-메일을 발송한 뒤 서비스 등을 내세워 회원으로 가입케 하는 수법으로 개인정보를 빼낸다. 우량기업의 명성이 망토가 된 것이다.

그럴듯한 직함은 사람들을 약하게 만든다. 한 신도에게서 수십억원을 가로챈 혐의로 구속된 김길수씨는 지난 대선 출마자.국태민안호국당 대표.세계법왕 등의 직함을 갖고 있었다. 최근 경찰에 붙잡힌 30대 무직자는 '미국 코넬대 출신의 컴퓨터 프로그래머'라는 가짜 명함을 이용해 여성들을 농락했다.

특히 국내에선 권력이 유용한 사기의 수단이다. 현 정권들어 대통령 부인 6촌 동생.정무수석.민정수석.민정1비서관.사정비서관 등 청와대 실세 또는 측근을 사칭한 범죄만 10건 발생했다. 이에 청와대는 사기범 감별법까지 내놓은 판이다.

정권의 권위주의는 과거보다 많이 퇴색했는 데도 권력의 망토가 여전히 활개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아무래도 가짜 권위를 내세우는 자들이 많은 탓일 게다. 심리학자들이 내놓는 '거짓 망토' 감별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어떤 사람이 내세우는 권위를 1백% 인정하라. 즉각 그가 그런 권위를 가질 만한 사람인지 의문을 갖게 될 것이다."

이규연 사회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