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시론] 경협 활성화, 北의지에 달렸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0면

4개 남북 경협합의서가 발효됐다. 2000년 8월 제2차 장관급회담에서 논의된 지 3년 만이고, 합의서에 서명한 2000년 12월 제4차 장관급회담 이후 2년반 만의 일이다. 분단 이후 중단됐던 남북 경제교류가 재개되기 시작한 1988년의 '7.7 특별선언'으로부터 따지자면 무려 15년 만에 처음으로 남북 경협의 제도적 장치가 갖추어진 것이다.

그만큼 반가운 일이다. 이제 남북 경협이 제도적 틀 속에서 추진되게 됐으며, 기업들도 실질적인 혜택을 볼 수 있게 됐다. 투자보장 합의서는 우리 기업의 투자자산 보호와 수용시 정당한 보상을 규정하고 있다. 이중과세방지 합의서는 조세부담 경감을 통해 투자수익을 증가시킬 것이다.

또한 그동안은 납기지연.품질불량 등 북한 측의 계약 불이행에 따른 손실을 우리 기업이 일방적으로 감수해 왔으나, 상사분쟁해결절차 합의서로 인해 분쟁의 신속하고도 효율적인 해결이 가능해졌다.

청산결제 합의서 역시 제3국 은행을 경유하는 데에서 오는 대금결제의 불편함을 해소하고 환전 및 송금비용을 절약하도록 함으로써 남북 경협의 확대에 기여할 것이다.

그러나 지나친 기대와 과도한 희망은 금물이다. 경협합의서 발효가 남북 경협의 즉각적인 활성화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경의선 철도의 연결이 곧장 '철의 실크로드'로 이어지는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철도가 연결돼도 당장 실어 나를 물자도 없고 사람도 없으며, 대륙철도와의 연계를 위해서는 10년 정도의 공사 기간과 10조원 이상의 비용을 필요로 하는 북한 철도의 현대화가 필수적인 탓이다.

사실 제도는 실질을 뒷받침하는 수단일 뿐이다. 제도보다 중요한 것은 제도를 지키고자 하는 의지이며, 제도가 의미있도록 하는 수익의 기회다.

돌이켜 보면, 10여년 전 기본합의서는 얼마나 우리를 들뜨게 했던가. 그러나 기본합의서의 '합의'는 문건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며, 당시 약속됐던 '제도'들은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하다. 또한 실제 투자가 없는 상태에서 경협합의서는 실질적인 의미를 가질 수 없다.

15년의 남북 경협 역사에도 불구하고 아직 대북 투자가 손가락을 헤아릴 정도인 것은 제도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수익성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제도가 미비해도 수익의 기회가 보이면 기업은 진출하게 마련이다.

예컨대 92년 한.중 투자보장협정이 체결되기 이전 우리 기업의 대중(對中)투자는 이미 3백여건에 달하고 있었다. 중국 정부의 적극적인 해외투자 유치 노력, 연간 10%가 넘는 고도성장, 확고한 개방.개혁 노선, 막대한 내수시장, 저렴한 노동력 등이 대중투자의 요인이었지 투자보장이나 분쟁해결이 문제였던 것은 아니다.

결국 남북 경협의 활성화는 북한의 정책적 의지와 경제적 변화에 달려 있다.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경수로 공사의 경우 북한 노동자의 임금을 1백10달러, 연간 인상률은 2.5%로 합의했지만 북한은 갑자기 6백달러를 요구했고, 요구가 관철되지 않자 노동자들을 철수시킨 바 있다. 합의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북한 당국의 의지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이번 경협합의서 역시 또 하나의 휴지조각이 될 것이다.

경제적 변화를 통한 수익성 기회의 제고 역시 남북 경협 활성화를 위한 근본 조건이다. 오늘날과 같은 중국 경제의 성장과 해외투자 유치를 가능하게 한 남순강화(南巡講話)에서 덩샤오핑(鄧小平)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전족(纏足)한 여인처럼 걸어서는 안 된다. 바로 본 것은 대담하게 시험해보고 과감하게 밀고 나가야 한다. 개혁과 개방을 하지 않으며 경제를 발전시키지 않고 인민생활을 개선시키지 않으면 죽음의 길밖에는 없다." 이와 같은 적극적인 경제적 변화가 없다면 앞으로도 활발한 대북투자를 기대하기는 곤란하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제도의 합의 자체가 아니라 경협의 실질적인 발전이다. 경협합의서 발효를 보면서 설렘보다는 불안함이, 희망보다는 걱정이 앞서는 것은 이 때문이다.

부디 기우이기를,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 바로 "왜 그리 쓸데없는 걱정을 했어?"라는 비난을 받고 싶은 심정으로 경협합의서의 순항과 남북 경협의 활성화를 기대해 본다.

조동호 한국개발연구원 북한경제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