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민간에도 ‘블라인드 채용’ 강요하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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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정의론』을 쓴 존 롤스(1921~2002)는 “정의의 원칙은 무지의 베일 뒤에서 선택된다”고 주장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공약인 ‘블라인드 채용’은 학벌과 지역을 ‘무지의 베일’로 가려 채용 시 차별 가능성을 줄이겠다는 구상이다. 출신 대학을 숨겨야 오로지 실력만 따지는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는 취지다.

문 대통령이 내세운 ‘블라인드 채용’ 로드맵이 5일 나왔다. 정부가 내놓은 ‘평등한 기회·공정한 과정을 위한 블라인드 채용 추진방안’이 바로 그것이다. 이번달부터 공공기관·지방공기업 채용 시 입사지원서에서 학력, 키·체중·용모 등 신체적 조건, 사진, 출신지역, 가족관계가 사라진다. 면접에서도 면접관들이 응시자 인적 정보를 알 수 없게 된다.

정부가 예상하는 기대 효과가 많다. 출신 대학이나 지역 때문에 받을 수 있는 불이익이 사라질 것이다. 사교육 수요도 대폭 줄어들 수 있다. 명문대 출신들에게 ‘블라인드 채용’이 지역할당제보다 오히려 유리하다는 전망도 있다. ‘어느 대학 출신은 사회성이 부족하다’는 식의 편견도 무력화될 수 있다.

신속한 행정이 곧 ‘졸속’ 행정은 아니다. 하지만 이번 방안이 과연 충분한 조사와 사회적 합의를 거쳤는지는 의문이다. ‘블라인드 채용’을 실험해 온 선진국에서는 이 제도가 오히려 차별을 확대했다는 주장도 있다. 아직 실험 수준의 제도를 성급하게 보편화시키면 부작용만 키울 수 있다. 민간 기업으로 이 제도를 확대할 때 각 기업의 채용 노하우, 전통, 정체성이 훼손되는 일도 없어야 할 것이다.

평등이나 정의는 소중한 가치다. 하지만 가치가 지나치게 효율성을 떨어뜨린다면 다시 생각해야 한다. 블라인드 채용이 국가와 기업의 경쟁력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충분한 연구와 보완 작업이 우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