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리셋 코리아

“지금같은 상황서 정부 대북 접근 신중해야 … 미국, 운전석 내줬더니 뭐하냐 할 수 있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8면

이영종
이영종 기자 중앙일보 통일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고수석
고수석 기자 중앙일보 부데스크
정영교 기자 중앙일보 기자
리셋코리아 통일분과 위원들이 4일 오후 서울 중구 프레이져플레이스에서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로 진퇴양난에 빠진 한반도 상황을 놓고 긴급좌담회를 하고 있다. 왼쪽부터 양문수 북한 대학원대 교수, 김근식 경남대 교수, 김혜영 민주평통 서울사회복지분과 간사, 이경주·김혜진 인턴기자, 김병연 서울대 교수, 박영호 강원대 교수, 이영종 통일문화연구소장. [김경록 기자]

리셋코리아 통일분과 위원들이 4일 오후 서울 중구 프레이져플레이스에서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로 진퇴양난에 빠진 한반도 상황을 놓고 긴급좌담회를 하고 있다. 왼쪽부터 양문수 북한대학원대 교수, 김근식 경남대 교수, 김혜영 민주평통 서울사회복지분과 간사, 이경주·김혜진 인턴기자,김병연 서울대 교수, 박영호 강원대 교수, 이영종 통일문화연구소장. [김경록 기자]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화성-14형’을 쏘아올리는 도발을 감행함으로써 한반도 정세에 먹구름이 닥쳤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말 한·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강조해 온 ‘한반도 운전자론’도 벽에 부닥친 모습이다. 북·미 간 가파른 대치에다 남북관계도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긴장 상황이다. 본지 연중 어젠다인 ‘리셋코리아’ 통일분과 위원들이 북한의 미사일 발사 당일인 4일 오후 긴급 좌담회를 열고 북한의 도발과 문재인 정부 대북정책의 진로를 진단해 봤다. 3시간 동안 진행된 좌담의 사회는 통일분과장인 김병연 서울대(경제학) 교수가 맡았다. 편집자

통일분과 위원 6인 긴급진단 #김정은과 깊은 대화 한 사람 없어 #‘북한 코드’ 정확히 못 읽는 게 문제 #북, DJ·노무현 때도 1년간 세게 나와 #문재인 정부 거기 휩쓸리면 안 돼 #정부가 너무 대화 강조하기보다 #대북 제재파에 힘 실어줄 필요

북한이 ICBM급 발사와 관련, ‘완전 대성공’을 주장하고 나온 국면에 참석자들은 심각한 우려를 나타냈다. 미국은 물론 유엔과 중국까지 대북제재의 고삐를 죄고 있는 마당에 김정은이 띄운 ‘승부수’가 상황을 악화시킬 것이란 얘기다.

양문수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노무현 정부 당시인 2006년 10월 첫 북핵 실험으로 엄청난 위기가 왔다. 문재인 정부도 뜻밖의 큰 걸림돌을 만났다”고 분석했다. 문 대통령이 집권 초반 대북정책의 동력을 잃을 수 있는 돌발변수에 봉착했다는 것이다. 김근식 경남대 교수는 “운전석에 우리가 앉으면 뭐하나. 시동이 제대로 걸리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다”고 지적했다. 박영호 강원대 교수는 “한·미 정상회담에서 미국이 ‘나쁜 경찰’, 한국이 ‘좋은 경찰’ 역할을 나눠 맡은 모양새지만 국제사회가 우리의 ‘선의의 역할’에 의미를 부여해 줄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관련기사

김병연 교수는 현 상황을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2013년 핵·경제 병진 노선을 발표한 이후 자신의 권력을 극대화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분석했다. 또 “문제는 한국 사회에서 그를 만나 깊은 대화를 한 사람이 없어 ‘김정은 코드’를 정확하게 모른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종석 한국건설관리학회 한반도통일 건설산업위원장은 “새 정부 들어 남북 경협과 교류·협력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졌고, 기업들도 대북진출을 통한 활로 모색을 구상했는데 악재가 터졌다”고 말했다. 북한이 당장은 보수 정부 9년 동안의 남북관계 단절과 대북투자 유치 재개 등에 관심을 보이지 않고 핵·미사일 드라이브에 나설 것이란 게 이 위원장의 진단이다.

앞으로의 대북정책 추진 과정에서 정부가 중심을 제대로 잡아야 한다는 주문도 나왔다. 박영호 교수는 “북한은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처럼 문재인 정부도 처음 1년 동안 자기 식대로 세게 밀어붙일 것”이라며 “거기에 휩쓸리면 안 된다”고 말했다. 양문수 교수는 “큰 그림보다 작은 그림을 많이 그려야 한다”며 “북한이 원하는 방향으로 돕겠다는 방식으로 대북 설득을 지속해 가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병연 교수는 “지금은 망원경을 가지고 멀리 볼 것이 아니라 현미경으로 현실에서 실현 가능한 부분을 찾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라고 권고했다.

꼬인 한반도 상황을 푸는 해법으로 민간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왔다. 당국이 나설 수 없는 국면에서 민간단체나 기업이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고, 정부도 이를 활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취지다. 이종석 위원장은 “북핵·미사일과 상관없는 민간이 주도하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할 때”라며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1998년 6월 소떼 방북으로 남북관계의 물꼬를 뚫었다”고 사례를 들었다. 북한은 소떼 방북 직후 장거리 미사일인 대포동 1호를 쐈지만 대북제재 여론 속에서도 정 명예회장이 그해 11월 금강산 관광 첫 배를 출항시켰다. 김혜영 민주평통 서울사회복지분과 간사는 “북한 주민들에게 필요한 의료·보건 서비스 관련 아이템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대북특사 파견 주장도 나왔다. 박영호 교수는 “국정원장이 평양에 가는 등 비공식 창구를 마련해야 이를 디딤돌로 공식적인 절차가 가능해진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병연 교수는 “좋은 아이디어이지만 제재 국면 속에서는 한계가 있다”고 반론을 제기했다. 김 교수는 “운전석을 내줬더니 뭐하는 거냐는 생각을 미국이 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긴장 해소와 남북관계 돌파구 마련을 위한 물밑 조율의 필요성에는 공감대가 만들어졌다. 김근식 교수는 “토마스 바흐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을 접견한 문 대통령이 북한 선수단의 평창 동계올림픽 참가를 거론했다”며 “대북 사전 조율 없이 이런 말을 불쑥 꺼내면 북한이 ‘우리 일을 이러쿵저러쿵 한다’며 불쾌한 느낌을 가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향후 한반도 정세와 대북정책 전망에서는 강경론 쪽에 무게가 실렸다. 양문수 교수는 “북한의 ICBM 도발로 결국 제재와 압박으로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며 “문재인 정부가 대북정책의 그림을 다시 그려야 한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이 5일 시작한 독일 방문과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참석을 계기로 선보이려던 대북구상이나 선언에 차질이 생기도록 한 건 북한의 패착이란 분석도 나왔다. 김정은의 도발적 행태에 대한 국민의 비판 여론과 국제사회의 우려를 반영하지 않을 수 없다는 얘기다. 김병연 교수는 “문재인 대통령이 당분간은 대화를 너무 강조하기보다는 정부 안팎의 제재파에게 힘을 실어 주는 전략적 고려를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특별취재팀=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 이영종(통일전문기자) 소장, 고수석 연구위원, 정영교 연구원, 이경주·김혜진 인턴기자 ko.soosuk@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