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영 칼럼] 천당에 연옥의 시련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죽어도 법대' 결심이 입시 준비 막판에 상대로 바뀐 것은 그놈의 '라인강의 기적'때문이었다. 머리가 아닌 배로 배고픔을 알았던 우리 세대한테 패전의 잿더미에서 불사조처럼 일어선 독일 경제의 재건은 단연 관심 집중이었다.

인생의 진로까지 바꾸어 놓은 라인강에 한참 뒷날 손을 담갔다가 나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온 말이라니: "이거 그냥 강물 아냐?" 마르크가 한 움큼 집힐 것도 아닌데….

독일 예찬에 이런 삽화도 있다. 1960년대 신참 유학생에게 고참 선배가 이르기를 "Y형, 독일은 천국이에요. 식당에서 밥을 더 달라면 더 준다니까요." 쌀밥이든 감자 튀김이든 대학 식당의 리필(?) 인심이 가난한 유학생의 눈에는 그대로 천국이었다.

*** 右派 메뉴 꺼낸 獨슈뢰더 내각

그 천당이 지금 연옥의 시련을 겪고 있다. 1980년대 이후 미국 경제는 탄력을 되찾은 데 비해 독일 경제는 반환점에서 기력이 다한 마라토너 꼴이다. 지난주 슈뢰더 내각은 개혁 과제 '어젠다 2010'을 발표했다.

노동 시장 유연화와 기업 부담 완화를 근간으로 소득세 인하와 의료수가 인상이 포함됐다. 사민당(SPD) 출신 총리로서는 완전히 백기를 든 셈이다. 그리고는 방송을 통해 "분배 위주의 사회 정책은 종말에 이르렀으며…앞으로 정책은 기회 균등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외쳤다.

이쯤 되면 그야말로 막 가자는 말씀이다. 감세, 복지 축소, 기회 균등은 자고로 우파의 전매 특허였다. 우파의 메뉴를 좌파가 내놓아서 그런지 야당인 기민당(CDU)은 불감청(不敢請) 고소원(固所願)으로 어젠다 시행에 적극 협조할 뜻을 밝혔다. 좌우가 바뀌고, 좌파 대의를 우파 실리가 뒤집은 것이다.

48년부터 73년 '오일 쇼크'까지의 4반세기를 흔히 '자본주의 황금기'라고 부른다. 무엇이 그 시대를 열었는가? 유효수요 창출이니 노동 착취 강화니 논의가 무성했지만, 축적의 경제적 구조를 넘어선 축적의 '사회적 구조'가 핵심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일례로 노조가 과격 투쟁을 자제하는 대가로 자본은 생산성 증대의 국물을 나눠준다는 합의가 있었는데, 노자의 이런 평화 협약이 전후 경제에 황금을 입혔다는 것이다. 가일층 밀어붙여 '노동자가 주인 되는 세상'을 만들었어야 한다는 반론도 있지만, 그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 제기다.

독일의 라인 모형은 미국형 시장 대신 신뢰가 주축이었다. 노사 공동 결정, 노조의 경영 참가 등 대결보다 협력이 앞섰다. 그러다가 세계화 풍파를 만났다. 복지 비용이 웬만큼 비싸도 슈뢰더의 변절없이(!) 독일 경제의 저력으로 버텼으리라.

그러나 툭하면 근로자의 목부터 자르고 나서는 외국 기업들과 생사의 경쟁이 바로 국내 시장에서 벌어지는 마당에 분배 찾고 복지 챙기다가는 공장이 문을 닫을 판이었다. '독일 병정'기율도 소용없고, 금융-기업-정부의 전방위 디펜스도 헛일이었다.

지난 6월 세계 최강의 산별노조라는 독일의 금속노련(IG Metall)이 파업 4주 만에 스스로 파업을 철회했다. 자동차회사(VW, BMW) 측의 가동 중단과 공장 폐쇄도 영향을 미쳤겠지만, 노조의 강공이 가뜩이나 어려운 국가 경제를 파탄으로 몰아서는 안 된다는 자성 때문이었다.

연전연승 행진 49년 만에 최초의 패배 자인이 노조 지도부로서는 무척 곤혹스러웠겠지만 국민은 아름다운 후퇴로 받아들였다. 50년대 기적 당시에 기업이 노조를 도왔듯이 2000년대 시련에는 노조가 기업을 돕는 셈인가?

*** 복지 챙기다간 공장 문닫을 판

국내의 주5일 근무제 현안이 타결 막바지에 이르렀다. 이것이 세계의 대세라면 재계는 충격 완화니 점진적 시행이니 토를 달지 말고 적극적으로 응했어야 한다. 이리 빠지고 저리 피하다가 현대자동차 노사 합의 '쇼크'를 보고야 허겁지겁 정부안에 매달리는 태도는 정말 보기 딱하다.

노조 역시 이 '대단한 성취'에 임금 몇푼, 휴가 며칠 따위의 쩨쩨한 계산은 버리기 바란다. 총파업 대응은 온 국민의 축제에 꽃 대신 재를 뿌리는 격이다.

이번에 밀리면 못된 버르장머리만 가르친다는 기업의 강박 관념과, 이번 기회를 놓치면 끝이라는 노조의 초조감이 맞부딪친 사생 결단의 싸움이 우리 경제를 죽이고 있다. 아 참, 독일의 학생 식당은 아직도 밥을 더 주고, 노조와 기업은 나라 경제를 위해 '적과의 동침'조차 마다하지 않는다.

정운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