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이례적 공동성명 지연, 자주외교 험로 보여준 7시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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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방미 마지막 일정으로 1일(현지시간) 워싱턴 캐피털 힐튼 호텔에서 열린 동포간담회에 참석, “두 정상 간에 깊은 신뢰가 형성됐다”고 말했다. 이날 환영사를 한 래리 호건 메릴랜드 주지사가 태권도 시범을 보이고 있다. 왼쪽부터 유미 호건 주지사 부인, 김정숙 여사, 문 대통령, 호건 주지사. [김성룡 기자]

문재인 대통령이 방미 마지막 일정으로 1일(현지시간) 워싱턴 캐피털 힐튼 호텔에서 열린 동포간담회에 참석, “두 정상 간에 깊은 신뢰가 형성됐다”고 말했다. 이날 환영사를 한 래리 호건 메릴랜드 주지사가 태권도 시범을 보이고 있다. 왼쪽부터 유미 호건 주지사 부인, 김정숙 여사, 문 대통령, 호건 주지사. [김성룡 기자]

정상회담을 불과 20분 앞둔 지난달 30일(현지시간) 오전 9시55분. 윤영찬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이 한국 기자단이 머물던 미국 워싱턴 리츠칼튼 호텔 앞에서 어딘가로 휴대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 표정은 어두웠다. 그러곤 “할 수 없다. 일단 가야겠다”며 회담 장소인 오벌오피스가 아닌, 백악관 영빈관으로 떠났다.

북핵 이슈 담긴 양국 정상 성명 #백악관 지각 결재에 공개 늦어져 #트럼프, FTA·무역 불균형 등 #자국 여론 무마 위한 발언 다 해 #노련한 트럼프에 혹독한 경험

영빈관은 호텔에서 차로 18분 거리다. 윤 수석은 한·미 단독 정상회담 후 열리는 확대 정상회담 배석자다. 그가 지각을 각오하고 영빈관으로 떠난 이유는 양국이 회담 전 이미 합의한 공동성명에 대해 미국이 ‘행정적 절차’를 들어 공개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전날 밤 청와대는 “공동성명에 대부분 합의했다”고 호언한 상태였다. “회담 전 공동성명을 완성하는 게 상식”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이날 오전 10시20분 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트 미국 대통령의 단독 정상회담이 시작됐을 때도 공동성명은 나오지 않았다. 시차 때문에 국내 언론사 마감 시간은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공동성명 원고를 재촉하는 기자단에 청와대는 ‘묵묵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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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사이 미국 언론을 통해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재협상을 요구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불만 섞인 정상회담 모두발언이 중계되고 있었다. 현지 TV 화면에 비친 문 대통령의 표정은 어두웠다.

정보에서 철저히 소외된 한국 기자단은 외신을 보고 기사를 작성할 수밖에 없었다. 정상회담에서 북핵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으려던 문 대통령에게 한·미 무역 불균형 해소, 방위 분담금 인상 등 ‘돈’을 요구한 트럼프 대통령의 모습만 부각될 수밖에 없었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을 비꼬는 트럼프 대통령의 자국용 ‘정치 수사(修辭)’도 그대로 타전돼 나갔다.

정상회담이 끝난 뒤 배석했던 청와대 참모진이 돌아왔다. “돈(FTA)을 주고 안보를 샀느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절대 그렇지 않다. FTA 재협상이란 말은 나오지도 않았다”고 부인했다. 이들은 “어느 때보다 북한 문제에 대해 진일보한 공동성명에 이미 합의한 상태”라고 주장했다. 그의 양복 주머니엔 ‘트럼프의 결재’ 전의 공동성명이 있었지만 공개할 순 없었다. 청와대도 답답할 따름이었다.

공동성명은 정상회담이 끝난 지 7시간이 지나서야 공개됐다. 전례 없는 일이었다. 성명서가 공개되기까지의 7시간 동안 트럼프 대통령은 정상회담을 마치고 골프를 치러 간다며 백악관을 비우기도 했다.

방미 수행 김경수 "7시간이 7년 같았다”

공동성명은 문 대통령이 그동안 주장해 왔던 ‘대화를 통한 평화적 북핵 문제 해결 방안’ 등에 미국이 지지를 표한다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FTA 재협상에 대한 구체적 문구는 없었다. 외교부 당국자는 “트럼프 대통령은 정치인일 뿐 결코 외교관이 아니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탄핵 등에 대한 국내 여론 무마 수단으로 정상회담을 활용했다는 뜻이다. 그래서 북핵 문제가 주로 담긴 성명서 발표를 미루게 하고, 미국 언론 앞에서 한·미 FTA와 무역 불균형 문제를 집중 거론했다고 청와대나 외교부 당국자들은 보고 있다.

문 대통령은 취임 전부터 ‘미국 일변도’의 외교 노선에 대해 비판해 왔다. 다자·자주 외교 노선을 본격 펼치기에 앞서 미국에서 노련한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 혹독한 실전(實戰)을 경험했다. 정상회담 특별 수행원으로 방미했던 김경수 민주당 의원은 페이스북에 “발표를 기다려야 했던 7시간이 7년은 되는 것 같았다”고 썼다.

워싱턴=강태화 기자 th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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