젓가락질로 신입사원 채용?…‘블라인드 채용’의 명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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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들 놀 때 공부했던 노력이 다 무시되면, 면접날 임기응변과 인상이 좋은 사람이 유리한 것 아닌가?”(대학생 최민식씨)

“정량지표 없는 ‘깜깜이 평가’가 되면 ‘연줄’있는 사람들 취업이 더 쉬워질 것 같다”(대학생 조모씨)

“차별 방지라는 취지는 공감하나, 지원자가 살아온 발자취를 모두 지우고 평가하자는 건 우려스럽다. 차별방지법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해결해야 할 일이지 시장의 인사시스템에 개입하는 건 지나치다”(취업포털 인크루트 서미영 상무)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쓰고 있는 취업준비생. [중앙포토]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쓰고 있는 취업준비생. [중앙포토]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22일 수석보좌관회의에서 ‘블라인드 채용’을 공공부문뿐 아니라 “민간 대기업에도 권유하고 싶다”고 언급하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블라인드 채용제는 입사지원서 항목에 출신지ㆍ가족관계ㆍ학력ㆍ학점 등을 삭제해 실력 중심의 평가를 정착시키자는 취지다. 청와대는 블라인드 채용 법제화와 ‘블라인드 채용 가이드북’ 제작도 추진하고 있다.

정부, 블라인드 채용 민간에도 권유 #취준생 “그동안의 노력 무시하는 것” #전문가 “지방대에도 유리하지 않아”

취업준비생들과 기업은 블라인드 채용 취지에 동의하면서도, 학력ㆍ학점ㆍ경력까지 보지 않는 것에는 난색을 보이고 있다. 대학생 이모(26)씨는 “성실히 노력해온 결과물들인데 왜 숨겨야 할 사안으로 치부되는 건지 모르겠다. 마치 내가 ‘랜덤박스’(어떤 물건이 들어있는지 모르는 상자)에 들어가는 희생자 같다”고 말했다. 전자 관련 대기업 인사팀 관계자도 “대학 학과나 학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하는데, 이를 모른 채 당일 면접만으로 뽑는 건 위험이 크다”고 말했다.

대기업들은 이미 2∼3년 전부터 사진이나 외국어 성적, 가족 관계 항목을 없앴다. SK그룹은 2015년 초부터 외국어 성적, 수상 경력, 사진 등을 보지 않는 ‘무스펙 채용’을 시행하고 있다. 롯데그룹도 2015년 상반기 공채부터 사진, 외국어 성적, 수상 경력, 봉사활동 등의 항목을 없앴다. LG그룹은 2014년부터 없앴다. 그러나 학교ㆍ학과ㆍ학점 등은 신입사원 채용을 위한 최소 요건으로 남겨뒀다. 한 대기업 인사담당 관계자는 “시험점수 비중이 큰 공무원은 블라인드로 뽑을 수 있지만, 기업은 공무원 시험 같은 과정이 없기 때문에 학력과 학점을 참고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블라인드 채용이 더 까다로운 진입장벽을 만들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김성희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연구교수는 “적합한 인재를 뽑아야 하는 기업들은 곧 새로운 평가 시스템을 개발할 것이다. 이게 지방대에 유리할 리는 없다”고 말했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도 “뚜렷한 대안이 없어 실효성에 의문이 든다”고 말했다.

기업이 ‘열린 채용’을 내세우며 이색 평가 제도를 만드는 것도 ‘취준생’들에겐 부담이다. 식품기업 샘표는 올해 상반기 대졸 신입사원 공개채용 최종단계에 ‘젓가락 면접’을 포함했다. 샘표 관계자는 “젓가락 면접은 젓가락으로 음식을 집는 모습을 관찰해 올바르게 사용하는지, 음식에 대한 태도는 어떤지 파악하기 위한 전형이다”고 설명했다. 취업준비생 조혜조(24)씨는 “‘젓가락질 잘못해도 밥 잘 먹어요’라는 노래 가사가 이미 20년 전에 나왔다. 2017년도에 젓가락질 수준으로 지원자를 평가한다는 건 다소 의아하다”고 말했다.

◇블라인드 채용과 충돌하는 ‘지역인재 30% 할당제’

대학과 출신지 등을 모두 배제하는 블라인드 채용과 함께, 혁신사업에 따라 지역으로 이전한 공공기관은 해당 지역 대학 출신 인재를 30% 할당해서 뽑으라는 정책도 역차별 논란이 일고 있다. 지역인재 지원시에는 당연히 출신 대학 또는 출신지를 밝혀야 한다. 지방 출신인 대학생 이지현(24)씨는 “19년간 서울 강남 살다가 지방대간 친구는 지역인재로 공공기관 취업하고, 평생 지방 살다 서울 명문대에 온 내겐 무슨 혜택이 있느냐. 이럴 거면 차별 없는 채용이라는 말은 왜 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김성희 교수는 “채용 문제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아주 민감한 문제다. 군 가산점 도입을 놓고도 수많은 이해관계가 얽혔었는데, 지역 공기업의 30%를 해당 지역과 대학에 할당하겠다는 건 역차별이다. 지역격차 해소라는 대전제에는 동의하지만, 채용을 볼모 삼을 게 아니라 지역활성화를 우선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준영 기자 kim.jun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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