섣부른춤 약속에 잠 못 드는 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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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7호 26면

이병옥·채희완·장인주·김영희·진옥섭

이병옥·채희완·장인주·김영희·진옥섭

‘아, 춤추고 싶다.’

무용 평론가들의 춤 … #27일 한국문화의 집에서 열리는 ‘무탐(舞貪)’

무용 취재를 하다 보면 문득 드는 생각이다. 보고 있으면 추고 싶다. 무용수들이 구슬땀을 흘리며 온몸으로 토해내는 ‘말’을 듣다 보면 내 몸까지 꿈틀거린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까칠한 비평을 일삼는 평론가들도 같은 형편인지, 5인의 무용 평론가가 잠시 펜을 놓고 팔을 들었다. 이병옥(70)·채희완(69)·김영희(56)·진옥섭(52)·장인주(50) 등 톱클래스 평론가들이 자전적 춤 이야기를 털어놓는 공연, ‘무탐(舞貪): 춤추는 평론가’(6월 27일 한국문화의집 KOUS)다. ‘춤을 탐한다’는 얘기다.

20일 오전 서울 대치동 한국문화의집. 텅 빈 무대 위에 흰 장삼을 걸치고 고깔을 쓴 여인이 혼자 염불과 장구 녹음 반주를 틀어놓고 살포시 몸을 움직이고 있다. 사뿐사뿐 발디딤새가 예사롭지 않다 싶더니 갑자기 소매에 숨겨져 있던 북채 두 개를 “땅땅” 맞부딪치며 대북을 치기 시작하는데, 현란한 북장단도 장난이 아니다. 발레 전공자로 알려진 무용평론가 장인주가 34년 만에 추는 승무다. 발레 이전에 인간문화재 故 이동안 명인의 수제자로 전통춤을 전수받은 그가 17살 때 무대에 섰던 영상을 복원하고 초 단위로 안무 노트를 짜 꼬박 석 달째 비지땀을 흘리고 있는 현장이다.

“북 가락이 관건이에요. 영상 속에선 정말 신들린 듯한데 오랜만에 하려니 맘대로 안되네요. 다행히 요즘엔 느리게 멋 부리는 스타일이 유행이라 저도 좀 멋스럽게 해보려고요.(웃음)”

1994년 프랑스 바로크 무용단 무용수로 활약할 당시 뉴욕 BAM의 서정 비극 ‘메데’ 출연을 끝으로 무대를 떠난 그가 23년 만에 ‘무한도전’에 나선 건 전통문화 기획자인 진옥섭 한국문화의집 예술감독의 ‘흉계’에 걸려든 탓이다. 지난 주말에도 서울에서 최초로 6시간짜리 남해안 별신굿 완판을 벌이는 등, 별스런 기획으로 손님 끄는 재주를 인정받으며 240석을 일찌감치 동내 버린 그다. 그는 ‘표 아니면 피를 판다’는 자신의 카카오톡 상태메시지를 보여주며 “손님만 온다면 못할 짓이 없다”면서도 “요즘 잠을 못 잔다”고 털어놨다.

“무용가들의 고초를 공감 중이죠. 이제 1주일 남으니 온몸에서 시간이 빠져나가는 느낌이에요. 다른 분들도 지금 마음의 골방에서 고생들 좀 하고 계실 겁니다. 무용인들과 평론가들이 몸에 대한 고민을 나눠보자는 뜻에서 기획한 무대죠. 남의 춤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사선에서 총을 한 번 맞아보자는 건데, 무용가가 한 동작을 위해 들이는 공만큼 평론가도 춤에 대한 고민을 깊게 하고 나면 한 문장을 위해 더 노력하게 되겠죠.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는 판이 됐으면 해요.”(진)

전문 무용수 출신은 장 평론가 혼자지만, 나머지 4인도 다들 ‘자기 흥으로’ 수십년간 춤을 춰 온 달인들이다. ‘목중춤’을 출 채희완 선생은 1970년대 서울대 미학과에서 탈춤 운동을 주도하며 대학 문화운동의 선봉에 섰던 탈춤계 거성이다. ‘산대무’를 선보일 이병옥 선생도 70년대 송파산대놀이에 입문해 45년간 탈춤판을 지켜왔다. 90년대부터 고창농악의 소고춤에 빠져 산 김영희 선생도 멍석이 깔리니 이내 ‘무탐’을 드러냈다. 유일한 프로 경력에 ‘최연소’인 장 평론가가 오히려 망설임이 길었다.

“한 달간 고민했어요. 결정적으로 엄마에 대한 미안함이 컸죠. 작년에 엄마 집을 정리하다 보니 그 옛날 입었던 의상부터 오래된 비디오 테입까지 하나도 안 버리고 고이 보관해 오셨더라구요. 옛날 영상을 못 볼까봐 고장 난 비디오 플레이어까지 수리해서 갖고 계셨는데, 그 고물들을 언젠간 내가 쓸 거라며 간직하고 기다려준 엄마에게 헌정하는 의미랄까요. 프로무대라면 못 서겠지만 아마추어 무용애호가의 심정으로 엄마 돌아가시기 전에 한 번만 서보려고 해요.”(장)

진 감독은 원래 탈춤 전수자로 영화 ‘왕의 남자’ 탈춤을 지도했을 정도의 실력자이지만, 이번에는 탈춤을 내려놓고 살풀이 장단에 맞춰 자유로운 형식의 즉흥춤인 ‘허튼춤’을 선보인다. “즉흥이라 특별한 형식이나 순서는 없지만 멋이 있어야 되니까 더 어려워요. 그간 봐왔던 풍월을 흥으로 멋으로 잘 풀어내야 하는데, 날짜가 다가올수록 겸손해지네요.(웃음) 내가 막을 열고 너스레를 떨어야 하는데 섣부른 춤 약속을 해놓고 창피해 죽겠어요. 택시 잡으면서도 춤을 추고, 지하철 승강장에서도 어슬렁거리면서 발디딤새를 연습하고 있네요.”(진)

굳이 어려운 살풀이 장단을 택한 건 살풀이에 대한 내밀한 로망 때문이다. “그 옛날 춤에 처음 빠져든 게 명무전에서 본 살풀이춤 때문이었어요. 살풀이를 배우고 싶었지만 결국 렛슨비가 싼 탈춤을 추게 됐거든요. 다른 분들도 각자 사연들이 있고, 자기의 비밀스런 추억들을 드러내는 일인 것 같아요. 누구에 대한 고마움일 수도 있고 자기 깨달음일 수도 있는, 그런 몸의 자서전을 발언하러 나가는 겁니다.”(진)

그는 “전문가의 영역인 승무가 제일 부담일 것”이라며 “빠른 와중에도 여유가 있어야 하는 북 가락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닌데, 장 선생의 연습 과정을 보니 점점 기대가 커진다”고 추켜세웠지만, 장 평론가는 “태가 옛날같지 않다”고 쿨하게 인정했다. “그저 연습을 지켜보는 극장 사람들한테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걸로 보이냐’고 물어요. 우리 춤은 동작이나 기술이 아니라 ‘신이 났구나’ 보여야 하는데, 요즘 승무를 보면 기술적으론 완벽하지만 진짜 좋아서 춘다는 생각은 안 들더군요. 신나서 추는 걸로만 보이면 그걸로 대만족일 것 같아요.”(장)

“글쎄요, 어느 누구도 만족 못할 겁니다. 이미 좋은 무대를 너무 많이 본 죄죠. 결국 자기 몸에 대한 자학만 남게 될 겁니다.(웃음)”(진) ●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한국문화의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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