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분석] 웜비어 사망으로 한미정상회담 먹구름 끼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북한에서 의식불명 상태로 송환된 미국 대학생 오토 웜비어(22)의 사망으로 열흘 앞으로 다가온 한미 정상회담에 적신호가 켜졌다.
정상회담을 통해 북한과의 대화와 교류확대에 대한 공감을 구하려는 한국과는 달리 미국 정부가 더욱 강경한 대북 압박 카드를 들고 나올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자칫하다간 대북 정책에서 입장차와 갈등만 부각되는 상황을 맞이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미국 내 반 트럼프 진영까지 '대북 강경 조치 필요' 주장 #대북 유화론 피려는 한국의 입지 어려워질 가능성 커 #"재러드 쿠슈너 의회증언 등으로 국면 변할 것" 낙관론도

19일(현지시간) 오후 4시 경 웜비어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직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발빠르게 움직였다. 즉각 성명을 내고 “미국은 다시 한번 북한 정권의 잔혹성을 규탄한다”고 말했다. 또 “인생에서 부모가 자식을 잃는 것보다 더 비극적인 일은 없다”며 “법률이나 인간의 기본권을 존중하지 않는 정권의 손에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당하는, 이런 비극을 막아야 하는 의무가 우리(미국) 에게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북한을 겨냥했다.

이어 트럼프는 오후 5시반 백악관에서 있은 과학계 인사들과의 모임 인사말도 북한 비판으로 시작했다. “웜비어가 북한에 억류된 1년 반 동안 많은 나쁜(bad) 일들이 발생했다(중략). 북한은 잔혹한 정권이며 우리는 앞으로 그걸(북한을) 핸들링할 수 있다”고 강조한 그는 이어 성명 내용을 자신의 트위터에 올렸다. 트럼프 스스로 이 문제를 최대한 부각시키는 모습이다.

무고한 자국 청년의 오랜 강제 억류와 혼수상태에 이은 억울한 죽음에 미국의 민심은 들끓고 있다.
최근 워싱턴을 방문해 미 정부 및 조야를 두루 접촉했던 우리 정부, 국회 인사들은 “미국 내 일반 여론은 고고도미사일방어(사드)체계 한반도 배치 문제 보다 웜비어에 더 민감하더라”고 털어놓고 있다.

정치나 외교를 잘 모르는 미국의 일반 국민들까지 분노하고 있는 현 상황은 트럼프 정부가 한미 정상회담에서 대북 강경론을 취하는 결정적 배경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선 “미국 입장에선 한국이 북한에게 대화를 제의하려는 것 자체가 자신들을 무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미국에선 대북 대화 목소리가 일제히 수면 아래로 내려앉고 대북 응징 주장이 강하게 대두하고 있다. 정상회담 의제를 최종 조율 중인 국무부의 렉스 틸러슨 장관은 이날 “미국은 웜비어의 부당한 감금과 관련해 반드시 북한에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 “북한이 불법 구금 중인 나머지 3명의 미국인도 석방할 것을 요구한다”고 강조했다.

평소 트럼프 대통령의 강경 일변도 대북 정책을 비판했던 리언 패네타 전 국방장관도 CNN에 출연, “북한을 잔혹한 정권이라고 비판한 트럼프 대통령의 대응이 옳다. 북한에 대해 강력히 대응하고 도대체 웜비어에게 북한이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철저히 진상을 밝혀야 한다”고 거들었다.

의식불명 상태로 미국에 돌아온 웜비어. 

의식불명 상태로 미국에 돌아온 웜비어.

북한의 구타설을 제기했던 뉴욕타임스는 “그동안 북한에 억류됐던 여러명의 미국인 가운데 코마(의식불명) 상태로 귀국한 것은 웜비어가 처음”이라며 “그의 죽음은 이미 긴장 상태에 있는 미국과 북한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킬 수 있다”고 전망했다. 사드 배치 지연 문제의 엇박자→존 매케인 상원 군사위원장 방한 취소 논란→문정인 대통령특보 발언 파문이 한미 동맹에 균열을 일으켰다면 윔비어 사망은 미국의 대북 스탠스를 차갑게 얼어붙게 만든 것이다.

소식통에 따르면 이번 한미 정상회담의 공동발표문에는 당초 ^대북 정책 협력 ^흔들림없는 한미동맹 재확인 ^한반도평화는 한국이 주도한다 등 크게 세가지 내용이 포함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웜비어 변수가 불거짐에 따라 대북 정책에서 대화(관여)의 중요성을 크게 부각하려는 우리의 입지는 좁아질 수 밖에 없게 됐다.

 문재인 대통령이 19일 외신 인터뷰에서 “북한이 인류의 보편적 규범과 가치인 인권을 존중하지 않는 것은 대단히 개탄스럽다”는 대북 비판성 메시지를 보낸 것은 미국 내 분위기를 감지하고 우호적인 정상 회담 분위기를 만들기 위한 정지작업으로 해석할수 있다.

이번 주 중 워싱턴에선 러시아 스캔들 관련 트럼프 사위 재러드 쿠슈너의 의회 증언, 트럼프 대통령과 제임스 코미 연방수사국(FBI) 전 국장과의 대화 테이프 존재 여부 공표 등 ‘대형 이벤트’가 예고돼 있다. 웜비어 건은 뉴스 우선 순위에서 밀려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국 조야의 격분이 당장 식을 것 같지는 않다.
워싱턴=김현기 특파원 luckyman@joongang.co.kr 4.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