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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려 내가 갈게… 산골 소녀의 절친 돼지 구하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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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6호 30면

 영화 ‘옥자’를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영화를 볼 때까지 옥자의 ‘실물’은 확인하지 않는 게 좋겠다. 제작진의 생각도 그러했는지, 포스터에 담긴 검은 실루엣을 제외하고는 사전에 공개한 어떤 사진에도 옥자의 모습을 담지 않았다. 기대가 컸던 만큼 스크린에서 확인한 옥자는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러웠다. 키 2.4m, 무게 6t의 하마 같기도, 코끼리 같기도 한 외모의 소유자지만, 뒤뚱뒤뚱 귀여운 움직임과 온순하고 맑은 눈망울로 보는 이들을 순식간에 사로잡는다.

29일 개봉하는 봉준호 감독 신작 영화 ‘옥자’ #감독 : 봉준호 #배우 : 안서현 틸다 스윈튼 제이크 질랜할 변희봉 #등급 : 12세 관람가

옥자의 정체는 ‘슈퍼돼지’다. 다국적 식품회사인 미란도 코퍼레이션이 미래 식량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여러 동물의 우성 유전자를 섞어 만들어낸 ‘작품’이다. 이 회사의 CEO 루시 미란도(틸다 스윈튼)는 이렇게 만든 신품종 돼지 26마리를 전 세계 농가에 보내 키우도록 한다. 그렇게 한국의 강원도 산골에 ‘파견’돼 할아버지(변희봉)와 둘이 사는 소녀 미자(안서현)와 둘도 없는 친구로 자라나는 옥자. 10년 후, 미란도는 훌륭하게 성장한 옥자를 회사 홍보에 활용하기 위해 미국 뉴욕으로 데려가려 하고, 미자는 베스트 프렌드인 옥자를 지키기 위해 집을 떠나 뉴욕으로 향한다.

일단 ‘옥자’는 흠잡을 데가 별로 없다. 소녀와 동물의 우정이라는 인류 보편을 감동시킬 스토리에 엉뚱한 인물들이 벌이는 소동극이라는 봉준호 감독의 장기가 결합됐다. 거기에 옥자를 이용하려는 거대 기업의 음모, 비밀 동물보호단체 ALF(Animal Liberation Front) 등을 등장시켜 동물권(動物權)과 유전자 조작의 윤리성이라는 묵직한 주제를 던진다. 한국과 미국, 캐나다 제작진이 함께 한 글로벌 프로젝트답게 비주얼 완성도 역시 높다. CG로 탄생한 옥자가 물에서 헤엄치고 도심을 휘젓는 장면은 전혀 어색하지 않다. 겹겹의 산으로 둘러싸인 미자의 집, 옥자와 미란도 관계자들이 벌이는 서울 지하도 추격전 등은 압도적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마음을 잡아끄는 가장 큰 이유는 다른 데 있다. 10년간 마음을 주고받으며 성장해 온 인간 미자와 동물 옥자의 교감이 전혀 상투적이지 않고 생동감있게 그려진다는 점이다. 초반부 미자와 옥자가 절벽과 계곡을 뛰어다니며 노는 장면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이웃집 토토로’를 연상시킨다. 무엇보다 신인배우 안서현이 연기한 미자의 ‘진격하는’ 캐릭터는 매력적이다.

미자는 옥자가 끌려갔다는 소식을 듣고도 훌쩍대지 않는다. 돼지 저금통을 바닥에 내리쳐 깨부수고 여비를 챙긴 후 산을 뛰어 내려간다. 미란도 회사의 닫힌 유리문을 망설임 없이 몸으로 뛰어들어 부수는 장면 등은 폭소와 함께 짜릿한 쾌감을 안긴다. ‘괴물’ ‘설국열차’ 등의 전작에서도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소녀들을 등장시켰던 봉 감독은 “소녀의 강인함이 주는 아름다움”을 이 영화에서 제대로 보여준다. 배우이자 프로듀서로 참여한 틸다 스윈튼은 14일 열린 기자 간담회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현실에서 생존하려면 거짓을 말하고 서로를 속여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꼭 그럴 필요는 없다. 나 자신에게 중요한 가치와 누군가에 대한 사랑을 지키면서도 인간은 성장할 수 있다는 걸 미자와 옥자가 보여준다.”

영화는 뜨거운 논란 속에서 공개를 앞두고 있다. 제작비 5000만달러(약 564억원)를 지원한 세계적인 스트리밍 업체 넷플릭스는 애초 온라인으로만 작품을 공개하려했지만, 봉 감독의 특별 요청에 따라 한국과 미국, 영국에서 극장 개봉도 함께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CGV를 비롯한 국내 멀티플렉스 3사는 “온라인과 극장 동시 개봉이 영화계 질서를 어지럽힌다”며 상영을 거부했다. 그간 영화계에서 암묵적으로 지켜져 온 ‘선(先) 극장 개봉-후(後) 온라인 서비스’의 원칙이 훼손되는 데 대한 우려다.

이에 따라 ‘옥자’는 서울극장·대한극장·대구 만경관·인천 애관극장 등 6개 도시 7개 극장에서만 29일부터 상영을 시작한다. 봉 감독은 “관객들이 극장의 큰 화면으로도 영화를 즐겼으면 하는 내 욕심 때문에 이런 혼란이 벌어졌다”며 “변화하는 매체 환경 속에서 새로운 규정이나 룰을 정비하는 데 옥자가 신호탄 역할을 한다면 그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

글 이영희 기자 misquick@joongang.co.kr, 사진 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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