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report] 치고 올라오는 ‘AI·빅데이터 신입사원’ … 은행원은 괴로워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02면

“친절·미소·성실은 더이상 은행원이 갖춰야할 핵심가치가 아니다. 필요한 건 ‘디지털 마인드’이다.”

시중은행 ‘디지털 강화’ 후폭풍 #생체인증·음성인식 기술과 결합 #투자 상담, 자산관리 대면업무 대체 #효율적 업무수행 등 장점 많지만 #간부들도 정년 채울 수 있을지 불안 #1년 새 4대 은행 인력 4800명 줄어

KEB하나은행 관계자는 최근 은행권에서 불고 있는 변화의 바람을 이같이 설명했다. ‘핀테크’에 이어 ‘4차 산업혁명’이 금융권 화두로 떠오른데다 인터넷전문은행의 출범으로 위기감마저 일고 있다. 은행에 있어 이제 디지털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됐다.

시중은행이 추진하는 디지털 강화 방안의 핵심은 빅데이터와 인공지능(AI)다. 함영주 KEB하나은행장은 지난 4월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를 활용한 여신심사나 리스크 관리 등 은행업무의 디지털화를 통해 디지털 은행을 만들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과거 은행원들이 고객들과의 대면 접촉을 통해 습득했던 자산규모·투자성향 정보는 빅데이터로 관리하고, 이를 기반으로 AI가 고객 맞춤형 상품을 제안하는 식이다. 실제 각 시중은행들은 빅데이터 관리를 위한 전담 부서를 신설·확충하고, 음성뱅킹과 로보 어드바이저 등 AI 기술을 적용한 각종 디지털 시스템을 구축중이다.

빅데이터와 인공지능 기술이 결합된 대표 상품이 ‘AI 음성뱅킹’이다. 고객이 말로 명령을 내리면 인공지능 프로그램이 인식해 계좌이체부터 상품 가입까지 대부분의 은행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특히 음성인식 기술은 생체인증 기술과 결합해 점차 편의성이 커지고 있다. “엄마한테 3만원만 보내줘”라는 음성 명령을 내리면 휴대전화에 입력돼 있는 지문을 통해 본인 확인절차를 끝내고, 인공지능이 상대의 계좌번호를 검색해 돈을 이체하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일부 은행에선 빅데이터와 AI 기술을 결합한 ‘로보 어드바이저’가 이미 상용화 단계에 들어섰다. 로보 어드바이저는 로봇(robot)과 상담사(adviser)의 합성어로, 사람 대신 인공지능이 빅데이터를 분석한 뒤 자산관리 등의 금융서비스를 제공한다. 우리은행이 지난 5월 출시한 ‘우리 로보-알파’가 대표적인 로보 어드바이저다. 로보-알파는 과거 은행거래 내역과 가입 상품 등을 토대로 투자자의 성향을 분석한 뒤 빅데이터를 활용해 맞춤형 자산관리 서비스를 제공한다.

음성인식 기능을 탑재돼 있어 고객의 질문에 답을 하는 등 일상적인 모든 대화가 가능하다. 우리은행 관계자는 “로보-알파는 방대한 양의 빅데이터를 바탕으로 실시간 금융정보를 인식할 수 있어 가장 높은 수익을 달성하는 방향으로 수시로 포트폴리오가 조정된다”며 “사람과 달리 24시간 가동 가능해 은행원에게 상담을 받는 것보다 시장 변화에 더 발빠른 대응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은행권의 디지털 혁신이 빨라지면서 이를 지켜보는 ‘인간 은행원’의 위기의식도 커진다. 고도로 진화한 인공지능의 경우 사람보다 더욱 정확한 일처리와 효율적 업무수행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은행원의 종말’은 먼 미래의 일이 아닐 수 있어서다. 시중은행의 한 지점장은 “직급에 상관없이 은행권 전반에 인력 구조조정 바람이 불고 있어 지금의 간부들조차도 정년을 채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어렵게 입행한 신입사원들 사이에서도 언제 쫓겨날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위기감이 상당하다”고 말했다.

은행의 디지털화와 일자리의 상관관계는 새로 등장한 인터넷전문은행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오는 7월 출범 예정인 카카오뱅크는 직원 수가 295명에 불과하다. 고객센터 상담을 맡은 직원이 55명이고, 나머지 직원 중 57%는 정보통신기술(ICT) 관련 인력이다. 은행·증권·카드사 출신인 일반적인 금융 인력은 약 100명에 그친다.

황은재 카카오뱅크 매니저는 “오프라인 지점이 아예 없다보니 일반 시중은행의 2~3% 수준으로 인력을 줄일 수 있다”며 “빅데이터와 IT 개발 인력을 추가로 뽑더라도 최종적으로 직원 수는 300명대에 그칠 것”이라고 설명했다.

시중은행들은 수년 전부터 인력 감축과 지점 폐쇄를 진행 중이다. 지난해 1분기에 6만3877명 수준이던 4대 시중은행의 직원수는 올해 1분기 5만9059명으로 줄었다. 1년만에 4800여 명이 은행을 떠났다. 4대 시중은행의 점포수 또한 지난해 3853개에서 올해 3687개로 줄었다. 신한은행의 경우, 한 점포에 통합돼 있던 기업담당 창구와 개인고객 창구를 분리해 2개의 점포로 나누며 30여개의 점포가 늘었지만, 직원 수는 250명 가까이 줄어드는 등 인력 감축이 이뤄지고 있다. 한국씨티은행은 전국 133개 점포를 32개로 통폐합하겠다는 계획을 밝히고 있다.

인력 감축은 은행권을 넘어 디지털 대변혁의 시기를 보내고 있는 전체 금융권으로 번지고 있다. 14일 금융·보험 인적자원개발위원회(ISC)가 발간한 ‘2017 금융보험산업 인력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2012년 40만3808명이었던 금융·보험 산업 종사자 수는 지난해 39만5775명으로 8033명 줄었다. 업종별로는 증권(6926명), 은행(5612명), 보험(2499명) 순으로 일자리가 감소했다.

보고서를 작성한 박두성 금융투자협회 차장은 “모바일·인터넷뱅킹을 중심으로 한 비대면 거래 확대로 지점 수가 감소했고 이에 따른 금융권의 구조조정이 지속되면서 고용 환경이 악화됐다”고 설명했다. 2012년부터 2016년까지 금융·보험 국내 영업점포 수는 은행 595개, 보험 894개, 증권 446개 등 1875개가 감소(9.4%)했다. 박 차장은 “전문 계약직과 경력직 증가, 희망퇴직으로 인한 근속연수 감소로 안정적이고 양질인 일자리라는 금융·보험업계의 특징이 점차 옅어지는 추세”라고 밝혔다.

정진우·여성국 기자 dino87@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