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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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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5호 27면

미켈란젤리(좌)와 첼리비다케의 공연 실황 모음집. 두 사람이 함께 한 사진은 희귀하다.

미켈란젤리(좌)와 첼리비다케의 공연 실황 모음집. 두 사람이 함께 한 사진은 희귀하다.

용산의 한 음반가게에서 버킷 리스트에 들어 있는 LP를 발견했다. 그것은 가게 입구의 높은 곳에 전시돼 있었다. 미켈란젤리가 1957년 녹음한 라벨의 피아노협주곡 G장조 초반. 에토레 그라시스 지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반주다. 피아노 뱃속의 해머와 피아노선을 촬영한 재킷 사진이 멋지다.

an die Musik : #라벨 피아노협주곡 G장조

나의 시선을 따라온 주인이 한마디 했다. “보기만 해도 좋은 음반이죠.”

사람 무시한다 싶었지만 살 엄두를 내기 힘든 것은 사실이다. 명반에 초반이면 LP는 매우 비싸다. ‘라면 끓여 먹는데 고려청자, 조선백자를 쓸 필요가 있냐’며 리이슈 들으면 된다고 주장하지만, 초반에 대한 갈증을 삭이긴 힘들다.

CD 살 바에야 유튜브로 듣자 싶어 검색하다 다른 음원을 발견했다. 미켈란젤리가 첼리비다케 지휘, 런던심포니 반주로 연주한 라벨인데, TV 방송용 실황이다. 두 사람의 얼굴 나이로 추정해 보건대 1980년대 후반이다. 시청했는데, 대단했다. 허공에 흩어지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절정의 순간이 고스란히 기록으로 남았다.

두 사람 모두 악명이 높았다. 미켈란젤리는 까다로운 완벽주의자로 공연 관계자를 노심초사하게 했다. 컨디션이 좋지 않거나 악기의 상태, 홀 음향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연주를 하지 않았다. 연주를 시작해도 청중이 기침 몇 번 했다고 벌떡 일어나서 나간 적도 있다. 그는 “오직 나와 작곡가를 위해서만 연주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완벽한 상태가 갖춰지면 그의 피아노는 얼음처럼 투명하면서도 화사한 소리를 낸다. 드뷔시와 라벨 등 몇 안 되는 음반들은 하나같이 최고다.

첼리비다케도 독재형 완벽주의자였다. 오케스트라를 죽도록 연습시켜 단원들이 질색했다. 그래도 연주는 훌륭하다. 강한 집중력에 울림이 풍부하다. 만년에는 템포가 극단적으로 느려졌는데, 그 매력이 열렬한 추종자 무리를 탄생시켰다. 이렇게 유별난 두 사내가 한 무대에 서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청중의 박수를 받으며 둘이 입장하는데 미켈란젤리가 앞장선다. 그런데 뒤를 따르는 첼리비다케가 박수를 치며 들어온다. 보기 힘든 모습이다. 피아노 앞에서 인사를 마친 미켈란젤리가 자리에 앉으려다 뒤를 돌아보고는 기다린다. 지휘자가 아직 포디엄에 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래된 영상물인데도 카메라웍이 좋다. 가볍게 약동하는 재즈풍 1악장에서 엄지로 건반을 좌우로 훑는 손을 보여준다. 바람이 부는 듯, 파도가 치는 듯한 그 소리를 어떻게 내는지 알았다. 1악장 후반, 하프의 신비한 음향 뒤에 리비도(Libido)처럼 소리가 비틀어지며 부풀 때 첼리비다케도 차가운 미소와 함께 입술을 비틀었다. 소름이 돋았다.

2악장은 1악장의 수선스런 분위기와 완전히 다르다. 그리움, 안타까운 추억의 정조가 넘실대는 정열에 실려 흐른다. 세상의 모든 느린 악장 중에서도 첫 손에 꼽을 만큼 아름답다. 처음 3분간은 피아노의 독백이다. 지휘자는 피아니스트를 향해 몸을 돌리고 지휘봉으로 악보를 가만가만 두드린다. 꿈결 같은 순간이다.

그렇게 마무리 되는가 했는데, 첼리비다케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진다. 오른쪽 저현악기들을 쏘아보며 짧게 중얼거린다. 첼로 주자 중 누군가 미스 터치를 한 모양이다. 표정으로 보면 “병신 같은 놈…” 수준의 욕을 내뱉는 것 같다. 유럽의 구석 루마니아 출신 지휘자가 세계 최강 런던심포니 주자를 졸(卒)로 취급한다.

3악장은 다시 스피디한 재즈 풍이다. 손은 건반 위에서 춤을 추고 소리는 소나기처럼 쏟아진다. 그러나 클로즈업한 피아니스트의 얼굴은 잠이라도 오는 듯 무표정하다.

23분에 걸친 연주가 끝났다. 청중은 환호하고 피아니스트는 퇴장했다가 다시 입장한다. 오케스트라도 악기를 내려놓고 두 손으로 박수를 친다. 처음 보는 모습이다. 첼리비다케는 포디엄에서 내려와 박수를 치다가 미켈란젤리와 악수하며 미소 짓는다. 최고의 연주를 합작해 낸 거인들이 그제야 표정을 누그러뜨린다. 미켈란젤리가 첼리비다케의 어깨에 손을 얹고 귀엣말을 한다. 지휘자는 그제야 생각난 듯 오케스트라를 일으켜 세운다. 지휘자가 깜박한 걸 피아니스트가 챙긴다.

까칠하기 짝이 없는 두 문제아가 이토록 친밀한 모습을 보여주니 낯설다. 둘은 베토벤의 황제협주곡 실황에서도 완벽한 하모니를 이뤘다. 결국 수준 문제다. 최고의 경지에 오른 두 사람이 서로를 알아보고 존중하는 것이다.

연주 영상을 본 사람들은 “비단결 같은 마술”이라느니, “23분간 라벨이 현신했다”느니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면 음반은 안 사도 되는가? 그렇지는 않다. 미켈란젤리의 유일한 라벨 정규 녹음인 그라시스 지휘의 그 LP를 구해야 한다. 영상은 한두 번 보면 그만이지만 음반은 들을 때마다 다른 연주를 들려준다.  ●

글 최정동 기자 choi.jeongd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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