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 파수꾼 대신 국익 장사 택한 트럼프 정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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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정부가 지난 1월 출범한 후 미국 외교의 축이었던 인권이 실종됐다. 대신 그 자리를 실리 외교가 메꾸고 있다.

사우디엔 인권 압박 않고 거액 무기계약 #북한 조이는 중국엔 연일 "잘 하고 있다" #틸러슨 "과도한 인권 요구, 국익 손해"

  니키 헤일리 유엔주재미국대사가 유엔 무대에서 인권을 이슈화하고 있지만 폴리티코는 4일(현지시간) “헤일리는 트럼프 정부의 외로운 목소리”라고 보도했다. 역대 미국 정부가 국제 사회를 향해 내걸었던 구호는 표현의 자유, 집회의 권리, 여성과 소수 인종 보호 등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보여온 행보와는 궁합이 잘 맞지 않는다. 주류 언론을 ‘가짜 뉴스’로 깎아내리고, 반(反)트럼프 집회를 비난하며, 백인 지지층에 의지해온 이가 트럼프 대통령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대외 정책에서도 인권 파수꾼 대신 국익 장사를 택했다. 이 같은 변화는 국제 무대에서 미국의 위상 약화로 이어지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20일 사우디아라비아 킹칼리드 국제공항에서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 사우디 국왕의 영접을 받고 있다. [AP=뉴시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20일 사우디아라비아 킹칼리드 국제공항에서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 사우디 국왕의 영접을 받고 있다. [AP=뉴시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21일 사우디아라비아의 리야드에서 “우리는 강의를 하러 이곳에 온 게 아니다”라며 “다른 이들에게 어떻게 살고 무엇을 하고 어떤 사람이 돼야 하고 어떻게 신앙을 가질지를 말하러 온 게 아니다”라고 연설했다. 중동 우방국인 동시에 여성 인권 문제로 논란을 빚어온 사우디아라비아에 사실상 인권 설교를 하지 않겠다고 자락을 깐 것이다. 대신 트럼프 대통령은 사우디아라비아에 124조원 어치의 무기를 판매하는 초대형 계약을 성사시켰다. 뉴욕타임스(NYT)는 이를 놓고 “트럼프와 측근들에게 인권은 무역의 걸림돌이 될 수 있다”며 “이란이나 사우디아라비아나 인권 상황이 유사하고 어떤 면에선 사우디아라비아가 더 열악하다”며 사우디아라비아의 인권을 문제 삼지 않는 이중잣대를 비판했다.

  트럼프 정부에선 중국을 겨냥한 인권 압박도 찾기 어렵다. CNBC는 “(중국) 인권 문제를 무시하는 (트럼프 정부의) 태도가 거슬린다”는 마거릿 루이스 세튼홀대 교수를 인용했다. 중국이 북한 조이기에 나서자 대중국 외교의 단골 메뉴였던 인권 탄압 거론을 자제한다는 관측이 제기된다. 대신 트럼프 대통령은 각종 인터뷰에서 “중국이 잘 하고 있다”며 중국 띄우기에 열심이다.

지난 4월 러시아 모스크바를 방문한 렉스 틸러슨 미국 국무장관(왼쪽)이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교장관과의 회담에 앞서 함께 걷고 있다. [AP=뉴시스]

지난 4월 러시아 모스크바를 방문한 렉스 틸러슨 미국 국무장관(왼쪽)이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교장관과의 회담에 앞서 함께 걷고 있다. [AP=뉴시스]

  인권 외교를 주도해온 국무부도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때와는 분위기가 다르다.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은 지난달 3일 국무부 직원을 대상으로 한 연설에서 역대 미국 행정부에선 찾아보기 어려운 파격적인 주장을 내놨다. 틸러슨 장관은 “이런 가치(인권)를 따르라고 너무 과도하게 조건을 걸면 안보적ㆍ경제적 이익을 증진하는데 장애가 된다”고 밝혔다. 인권을 최고의 가치로 전제하긴 했지만, 인권과 국익중 국익에 우선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다.

 NYT는 트럼프 정부가 인권 외교에 소극적인 이유를 트럼프 대통령에서 찾았다. 이 신문은 “트럼프는 이집트의 압델 파타 알 시시 대통령, 터키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등 스트롱맨에게 호감을 보여왔다”며 “지난해 대선 기간중 이들 국가의 내정 문제를 거론하지 않겠다는 점을 시사했다”고 보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한 인터뷰에서 에르도안 대통령의 쿠데타 진압과 반대파 숙청을 놓고 “우리가 (내정에 대해) 강의할 권리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워싱턴=채병건 특파원 mfemc@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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