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한 처지의 한민구 장관…“말로써 말이 많으니 말 말을까 하노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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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말에 이런 게 있잖나, ‘말로써 말 많으니 말 말을까 하노라~’고.”
 한민구 국방부 장관이 지난 3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제16회 아시아 안보회의에서 한ㆍ미 국방장관 회담을 끝낸 뒤 기자들에게 한 말이다. ‘지난달 28일 정의용 청와대 안보실장과의 오찬에서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ㆍ사드) 체계 미사일 발사대 4기 추가 반입에 대해 보고했니’란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그는 ‘말하기 좋다하고…’로 시작하는 작자 미상의 옛 시조의 한 구절을 인용했다. 그가 읊은 대목은 ‘말 때문에 시끄러워 지니, 차라리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 게 낫다’는 뜻이다.
한 장관은 “조사가 되고 나름 정리되고 하는데 이런저런 말을 하는 게 필요하지 않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한 장관은 이날 제임스 매티스 미국 국방부 장관과 만나 주한미군 사드 체계 배치에 대한 문재인 정부의 입장을 전달했다. “현재 진행 중인 사드와 관련한 한국 정부의 조치는 전적으로 국내적 조치”, “기존 결정을 바꾸려거나 미국에 다른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이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매티스 장관은 “이해하고 신뢰한다”고 답했다고 한다. 회담에서 ‘사드’라는 단어를 먼저 언급한 사람도 한 장관이었다. “한국 내에서 지금 사드 관련 논의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라면서 말을 꺼냈다는 것이다.
 한 장관은 회담 후 기자간담회에서 “(한ㆍ미 국방장관 회담의) 모든 의제에 대한 방향은 다 청와대와 조율한 내용”이라며 “(청와대와 사전 조율한) 문안을 충실히 애기했다”고 여러차례 강조했다.
 그러면서 ‘한국 정부의 조치’에 관해서는 “구체적으로 보고 문건 누락이라든지 환경영향평가라든지 이런 것을 적시해 얘기하지는 않았다. 다른 해석이나 덧붙임이 있는 얘기는 안 했다”고 했다. 청와대가 사전에 준비한 모범답안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역할만 했다는 의미다.
한 장관의 말은 그의 미묘한 처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한 장관은 본인이 매티스 장관에게 '전적으로 국내적 조치'라고 설명한 보고 누락 논란의 주요 당사자 중 한 명이다. 그래서 청와대의 조사까지 받았다. 하지만 현직 장관이라는 신분 때문에 본인이 개입돼 있는 논란에 대해 미국측에 설명해야하는 역할까지 떠맡았다.
그래서 한 장관 주변에선 "‘말로써 말 많으니 말 말을까 하노라~’란 시조를 읊은 것도 자신의 난처한 처지에 대한 자조처럼 들린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지난 2월 매티스 장관과의 회담,또 사전 실무협의를 통해 사드 체계 배치를 한국의 새 정부 출범 이전에 마무리하기로 합의한 당사자가 한 장관이었다는 점도 아이러니다.
싱가포르=이철재 기자 seaja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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