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전영기의 시시각각

이겨도 얻을 게 없는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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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전영기
전영기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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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다. 가장 피해야 할 건 이겨도 얻을 게 없는 게임이다. 막상 눈앞에 상황이 닥치면 어떤 경우에 해당하는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정의용 청와대 안보실장도 헷갈렸을지 모른다. 지난 일요일 한민구 국방부 장관과 점심을 할 때 그가 “사드 4기가 추가로 들어왔다면서요”라고 물었더니 상대방은 “그런 게 있었습니까”라고 의뭉스럽게 받아쳤다고 한다. 정 실장은 한 장관이 거짓말을 하거나 확인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한민구는 “관점이나 뉘앙스의 차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하루 동안 보고서를 작성하고 그 다음날 문재인 대통령한테 보고해 일이 밑도 끝도 없이 커져 버렸다.

사드 문제 대통령한테 넘긴 정의용 #한민구와 선문답 말고 승부 냈어야

딱히 위법하거나 절차를 어기진 않았다. 그래도 정의용이 상황을 풀어 가는 자세와 접근법은 미숙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사드 발사대 4기의 전개(2기는 이미 배치)를 ‘몰래 반입’ 사건으로 성급하게 단정지었다. 군사 무기의 이동은 적군에게 의도적으로 위세를 과시하는 등의 특별한 목적이 없는 한 비밀 전개가 원칙이다. 감시의 눈들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 사드 전개 과정을 공개하면 적의 먹잇감이 되기 때문이다. 미군과 국방부는 군사적 원칙에 따라 의당 해야 하는 방식으로 무기를 이동시켰다. 이를 두고 무슨 야밤 도둑질이라도 되는 것처럼 나쁜 짓, 부끄러운 일로 몰아갔다. 이러니 미 국방부가 대변인 발표로 “사드 배치 과정 내내 우리의 모든 조치는 투명했다. 사드 프로그램에 계속 매진할 것”이라고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

외교관 출신으로 통상교섭·다자(多者)협상 전문이라서 그런가. 정 실장이 무역이나 국제노동 이슈와 달리 한 번 실패하면 원상 회복이 불가능한 안보 문제의 총괄 책임자로서 의식의 치열성이 떨어지는 것 아니냐는 느낌을 갖게 된다.

정의용이 국방부의 ‘보고 누락’을 문제점으로 끄집어낸 건 잘했다고 본다. 보고 누락은 ‘비밀 전개’와 전혀 다른 사안이다. 그런데 정의용은 보고 누락의 문제만 발견했을 뿐 해결에는 이르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문제 해결의 부담을 대통령한테 다 넘겼다. 참모로서 문제를 해결하고 보고하는 게 순서인데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대통령한테 부탁한 모양새가 됐다. 정 실장은 한민구와 오찬 대화에서 선(禪)문답 같은 심리 게임을 하지 말아야 했다. 대신 마찰과 파열음을 감수하며 정면 승부를 냈어야 했다. 사드 이슈에 관한 수십 수백 개의 체크리스트를 제시하며 실무적 사실들을 하나하나 확인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정의용과 한민구 두 사람의 ‘관점이나 뉘앙스의 차이’는 얼마든지 해소되고 보고 누락 문제는 해프닝으로 정리됐을 것이다.

가치와 철학, 정책 방향이 180도 다른 신 정권과 구 정부의 인수인계는 삐거덕거리기 마련이다. 이 불협화음을 안보실장이 흡수해 낼 실력과 경륜이 있으면 새 대통령은 편하다. 반대로 흡수 능력이 허약하면 대통령이 힘들어진다. 문 대통령은 정의용 실장으로부터 미해결의 문제를 보고받고 “매우 충격적”이라는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파장을 극대화했다.

대통령의 충격은 고전을 빗대어 말하면 대붕(大鵬·거대한 새)의 치솟는 날갯짓 같아서 온 세상이 흔들린다. 국내적으론 국방부 상층부가 인적 청산의 두려움 속에 집단 멘붕에 빠졌다. 여야 가파른 대치전선이 조성됐다. 보수와 진보 간 진영 대결의 먹구름도 몰려드는 형국이다. 국제적으론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사드의 ‘진실의 순간’이 목전에 왔다. 미국과 중국이 한국의 양 팔, 양 다리를 잡아당기는 기세가 등등하다. 문 대통령은 미국 상원의원에게 “기존 결정을 바꾸려는 게 아니다. 진상조사 지시는 전적으로 국내적 조치”라고 선을 그었다. 하지만 한·미 동맹의 미래를 우려하는 구체적이고 공식적인 목소리가 미국 여기저기서 실명으로 터져나오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정의용 실장은 6월 말 한·미 정상회담을 사전 조율하기 위해 어제 미국으로 출국했다. 부재중인 사람한테는 미안하지만 그의 일처리는 미덥지 못했다.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