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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홍승일의 시시각각

경제개혁의 과속, 가격의 역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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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홍승일 논설위원

홍승일 논설위원

6470원인 시간당 최저임금이 2020년까지 1만원으로 오르게 되면 월수입 200만원 넘는 편의점 알바가 늘면서 종업원보다 못 버는 편의점주가 속출할 수 있다. 향후 3년간 최저임금 연평균 인상률은 15.7%에 달하게 된다. 2000년 이후 지난해까지 평균 8.6%의 거의 두 배에 가깝다. 하긴 가게 주인이 종업원보다 꼭 더 벌어야 한다는 법이 있는가. 시급 1만원쯤 되면 고생하는 데 비해 남는 것 없는 음식점·수퍼 문 닫고 아예 다른 가게 종업원으로 취직하는 일이 성행하지 않을까. 영세 자영업이 포화 상태라는데 점포 창업 구조조정 효과까지 있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일지 모른다.

잔칫상엔 청구서 날아들게 마련 #개혁 과정 시장의 보복 경계해야

문재인 정부가 1일 내놓은 ‘일자리 100일 계획’의 13가지 과제를 보면 이처럼 임금을 건드리는 조치가 많다. 주당 근로시간 상한을 68시간에서 52시간으로 확 줄이는 건 일자리 나누기를 겨냥한 것이지만 초점은 역시 임금이다. 사용자단체는 “임금 부담이 늘어난다”고 반발하는데 오히려 초과근로수당 한 푼이 아쉬운 저임금 근로자들은 “벌이가 줄까 걱정”이라며 표정이 어둡다. 정책 그 자체보다 보완 대책이 궁금한 경우다.

에너지 개혁의 도마에 오른 원자력·화력 발전, 70%에 이르는 이 비중을 확 줄이는 ‘전원(電源) 믹스’ 개혁안의 성패도 결국 요금에 달렸다. 전국 에너지 전공 대학 교수 230명은 1일 낸 긴급성명에서 “대선 공약대로 원자력·화력 발전 비중을 2030년까지 대폭 낮추고 생산 원가가 비싼 신재생에너지·액화천연가스(LNG) 발전으로 대체하면 36%의 전력요금 인상 효과가 불가피하다”고 추정했다. 경제규모에 비해 저렴한 전기·상수도·지하철 요금에 수십 년간 길들여진 우리 소비자들이 여름철 에어컨으로 인한 전기요금 폭탄을 어느 정도 감내할지 궁금하다. 방사능과 미세먼지 걱정 없는 안전하고 청정한 에너지를 향유하는 대가로 지갑을 얼마나 더 열 용의가 있는지, 표에 도움 되지 않는 질문이지만 꾸준히 국민에게 던져야 한다.

가격은 시장경제의 신호등이다. 물가뿐 아니라 임금·금리·환율 모두 가격 변수다. 우리나라 가계부채가 1400조원 가까이로 불어난 건 금리의 역습 때문이다. 저금리 시대의 도래로 은행 돈 빌리는 부담에 둔감해진 터에 금융권·정부가 앞장서 부동산 대출을 부추겼다. 가계부채 대응과 서민 보호 차원에서 들고나온 이자율상한제 역시 금리의 역습이 걱정된다. 제2금융권 대출의 이자율 상한선을 20%까지 낮추겠다는 건데, 정작 돕고자 하는 저신용 취약 서민계층이 제도권에서 돈 빌리는 일을 더 힘겹게 만들 게 분명하다. 연리 수백 %의 불법 고리 사채(私債) 시장에 내몰릴 수 있다.

‘공짜보다 비싼 건 없다’는 역설이 있지만 특히 경제엔 공짜가 없다. 좋다 싶은 일에는 예외 없이 가격표가 따라붙고 청구서가 뒤따른다. 돈의 시위는 광화문광장의 촛불·태극기 시위처럼 요란하지 않지만 우리 주변에 시나브로 다가와 느닷없이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는다. 1997년 외환위기도 가격의 역습, 돈의 배반이다. YS 정권이 우리나라 경제 실력 이상으로 원화가치를 높게 유지하려다가 환율의 역습을 당했다.

미국 출신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조셉 스티글리츠는 문재인의 성장철학과 궤를 같이한다. 일자리와 임금을 중시하는 소득 주도 성장론자다. 하지만 “불평등은 시장이 아니라 잘못된 정치에서 비롯된다”고 믿는 시장주의자다. 어려운 사람을 도우려는 선의(善意)의 정책이 오히려 역효과를 낼 때는 가격의 권도를 거스르는 인기영합주의일 경우가 많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경구는 그럴싸한 대의명분보다 촘촘한 실사구시(實事求是) 각론을 주문한 말이다. 비정규직 제로 정책이 당장 일자리 감소와 함께 임금상승의 역습을 초래할지 모른다는 재계의 의견은 화낼 일이 아니다. 이에 대해 “개혁에 저항하느냐” “비정규직 양산의 주역으로 반성부터 하라”는 식으로 윽박지르면 곤란하다. 일자리위원회의 정규직 드라이브에 벌써부터 일부 공기업은 공채 규모를 줄일 조짐이다.

홍승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