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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연평균 75권 9만 문제 푸는 ‘문제풀이 전사’ 고3 학생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8면

시험국민의 탄생
이경숙 지음, 푸른역사
452쪽, 2만5000원

‘문제풀이 전사’. 저자는 한국의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을 이렇게 부른다. 그가 인터뷰해보니 고3 학생들은 국어·수학·영어 문제집을 일년 평균 25권씩 총 75권 풀었다고 했다. 문제집을 펼쳐서 세어보니 약 1200개 문제가 있었다. 곱해보면 9만 문제다. 한국인은 기계처럼 문제를 풀어 제끼면서 각종 시험으로 쌓아올려진 삶을 살아간다.

시험은 한 사회의 성격을 보여준다. 사회가 어떤 것을 정의라고 생각하는지, 누구를 구성원으로 인정하는지 등을 드러낸다. 958년 고려 광종이 실시한 과거제부터 1907년 생긴 변호사 시험, 39년 중등학교 입학자 선발법, 61년 연합고사, 73년 행정고시, 82년 학력고사와 토익, 94년 대학수학능력시험, 95년 삼성직무적합성평가까지 “시험은 한국인의 사회적 DNA가 됐다”고 저자는 진단한다. 불공정한 사회에서 그나마 객관적인 평가 방법이라는 환영도 있었다. 그러나 때로는 교육이 있어야할 곳에 평가만 남겼다는 비판과 저항을 받으면서 시험은 생겨났다 없어져고, 또 다른 시험이 나타났다.

저자는 일제시대 시험의 사회사를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시험의 역사, 교육의 역할 등을 꾸준히 통찰했던 그의 결론은 다소 도발적이다. 우선 “시험을 치면 칠수록 학습효과가 높아진다고? 키를 자꾸 잰다고 키가 커지지는 않는다”고 일침을 놓는다. 시험이 공정하고 투명해지면 사회가 발전한다는 생각도 부정한다. 또 의대·법대 같은 인기학과의 신입생을 시험 대신 추첨으로 선발하는 네덜란드의 사례를 전한다. 고등학교 졸업의 기본 점수만 채우면 되는 방식이다.

이 책이 꿈꾸는 사회의 전제조건은 어떤 학교를 다니든, 어떤 직업을 가지든 인간으로서 자존감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저자의 희망은 ‘시험 없이도 스스로 성찰할 수 있는 사회’라는 방향으로 뻗어나간다. 누구나 쉬면서도 공부할 수 있고 스스로의 발전을 위해 배우는, 이른바 ‘지적 해방 사회’다. 비현실적인 것 같지만 시험의 1000년 역사를 들여다본 현실적 분석에서 나온 결론이다.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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