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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녹두거리의 상징 '그날이 오면' 서점 축소 이전... "취업난에 몰린 대학생들 안쓰러워"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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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앞 상점가인 녹두거리(서울 관악구 대학동)에 1988년 문을 연 서점 '그날이오면'(이하 그날)은 전국에 하나 남은 인문사회과학 전문 서점이다. ‘그날’은 당시 서울대 학생 문화의 중심지였다. 학회나 동아리 활동을 하는 학생들은 녹두거리를 찾으면 ‘그날’부터 들렀다. 서점 앞 게시판엔 “OO 주점에서 학회 뒤풀이를 한다”거나 “OO 카페에서 세미나를 한다”는 메모가 수십 개씩 붙어있었다.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 학생들은 그날을 통해 만나고 그날에서 공부할 거리를 찾고, 그날에서 고민을 나눴다.

90년대 서울대 학생들의 사랑방 역할한 서점 #경영난 못 이기고 골목길 작은 가게로 이전 #학생들 취업난과 개인화가 서점 운영에 타격 #"언젠가 서점 다시 북적일 거라 믿어" 희망도 #

그런 그날이 경영난을 견디지 못하고 축소 이전했다. 지난 18일 녹두거리 건너편의 주택가(서림동) 뒷골목에 막 문을 연, 25㎡의 새 가게에서 서점 주인 김동운 씨를 만났다.

김 씨는 “취업에 대한 걱정으로 사회에 대한 고민을 나눌 여유가 없는 대학생들이 안쓰럽다”면서도 “길게 보면 ‘그날’이 지키려 노력했던 인문사회적 가치가 다시 힘을 얻고 서점이 번성할 거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노동운동가 출신인 김씨가 88년 녹두거리에 ‘그날’을 열었을 때는 이미 대학가의 학생 저항 문화가 정점을 찍은 뒤였다. 90년대 들어 학생 운동이 빠르게 힘을 잃어가며 고려대 앞 장백이나 연세대 앞 알서점ㆍ오늘의책, 서울대 앞 열린글방ㆍ백두서점 등이 하나둘 문을 닫았다. 한때 그날은 이런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처럼 보였다. 98년엔 서점 위층에 세미나 카페를 열 정도로 경영 사정이 좋았다.

비교적 잘 버텨온 비결이 뭘까.
“책을 사는 장소라기보다 학생들의 사랑방 같은 역할을 해서였던 것 같아요. 그날에 오면 친구들이 어디에 모여있는지, 친구들은 어떤 책을 보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죠.”
학생들이 인문사회 서적을 읽지 않아 서점이 어려워졌나.
“2000년대 들어 조금씩 학생들이 줄기 시작했어요. 예전 학생들에 비해 지금 학생들은 미래에 대한 걱정이 훨씬 커요. 예전 학생들은 뭘 하든 못 먹고 살겠느냐고들 생각했고, 실제로 그만큼 일자리가 있었죠. 지금은 상황이 달라요. 왜 사회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느냐고 학생들 탓만 할 수도 없죠.”
왜 취업 준비나 어학 공부용 책은 들이지 않나.
“실용서를 들인다 해도 운영이 크게 나아질 것 같지 않아요. 정체성만 흐려질 뿐이죠."
학생 문화도 많이 바뀌었는데.
“혼술, 혼밥이라고들 하는데 실제로 그런 모습이 보여요. 예전엔 공부도 놀이도 같이 했죠. 요즘 학생들은 카페에서 혼자 수업 준비를 해요. 서점이 예전같지 않은 건 사실 이런 개인화가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해요.”
촛불집회를 보듯 대학생의 사회 참여는 여전히 뜨거운 것 아닌가.
“촛불 집회는 일시적인 분노 표출이라 생각해요. 사회의 궁극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고민하고, 이걸 나서서 해결해보겠다는 의지는 부족해요.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는 게 결과적으로는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는 인식 말이에요.”
요즘 학생들은 어떤 책을 많이 읽나.
“지적 갈증을 해소하기 위한 교양서를 많이 읽어요. 고시 공부나 취업 준비를 하다 공허한 마음이 들 때 우리 서점을 찾는다는 느낌이에요. 예전에는 사회는 어떻게 돌아가는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을 담은 책이 잘 나갔는데, 지금은 그런 책을 많이 찾지 않아요.”
서점 경영난이 오래된 걸로 아는데, 다른 일을 찾을 생각은 안했나.
“가족들에게 미안할 때도 있지만, 저는 최소한의 생활만 영위할 수 있다면 경제적 풍요를 얻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우리 사회가 가야하는 길에 내가 서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외롭다고 느낀 적도 없어요.”
다시 예전같이 서점이 북적거릴 수도 있을까.
“그렇게 생각해요. 지금의 이 흐름이 잘못 됐고, 이런 식으로는 절대 더 나은 세상으로 갈 수 없다는 걸 다들 깨달으면 흐름이 바뀔 거라 믿습니다.”

임미진 기자 mi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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