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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시민 참여 개헌으로 대한민국 재설계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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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김선택고려대·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김선택고려대·법학전문대학원 교수

5월 10일 새 정부가 출범했다. 그러나 지난해 10월 말부터 진행된 촛불혁명은 국정을 농단한 정부를 교체한 것만으로는 완성되지 않는다. 촛불을 들었던 주권자들은 국정 농단을 막지 못한 헌정체제도 수술할 것을 바라고 있다. 구체제를 비정상적으로 왜곡하는 데 앞장선 사람들에 대해 책임을 물어야겠지만 체제 를 건강한 민주주의로 혁신하기 위해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헌법 개정은 국민 권력임에도 #국민은 헌법 개정에 들러리 #‘국민 중심의 개헌’ 공약 지켜 #미래 밝힐 촛불혁명 완결해야

헌정사를 돌아보면 헌정체제를 일신할 기회가 몇 번 있었다. 1960년 4·19혁명과 87년 6·10항쟁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4·19혁명 때는 ‘선 개헌 후 총선’ 구호 아래 종전 집권세력이 다수 포함된 국회 주도로 12일 만에 개헌안이 만들어졌다. 6·10항쟁 때는 집권세력과 민주화세력을 대표한 여야 8인 정치회담에서의 타협으로 1개월 남짓한 단기간에 개헌안이 성안됐다. 4·19혁명의 주역인 학생들도, 6·10항쟁의 주역인 시민들도 개헌 과정에 참여하지 못했다. 국민은 혁명 과정에서 많은 희생을 감수했으나 혁명의 결실인 헌법은 종전 집권세력이나 새 집권세력의 전리품이 됐다.

대선 TV토론에서 문재인 후보는 4·19혁명과 6·10항쟁이 미완으로 끝났으나 촛불혁명은 반드시 완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대통령 한 사람 바꾸는 것으로 촛불혁명이 완성될 수 없다고도 했다. 촛불집회에 빠짐없이 참석한 그의 대통령 당선은 국민에게 이번만큼은 우리나라의 만년대계를 바로잡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게 해 줬다. 이번만큼은 혁명 주역인 국민 주도하에 헌법이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라는, 그렇게 만들어져야 한다는 간절함으로 국민은 새 정부를 지켜볼 것이다.

현행 헌법은 헌법을 제정하는 것도, 개정하는 것도 국민의 권력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럼에도 국회 또는 대통령에게만 발의권을 주고, 국회 의결을 거친 후의 헌법 개정안에 대한 찬반 표결권만을 국민에게 부여하고 있다. 문제는 헌법 개정 권력의 보유자인 국민이 헌법 개정에 주체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하느냐다. 완성된 헌법 개정안에 참여하지 못한 채 찬반만 결정하는 고무도장으로 국민을 전락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

헌법 개정안을 국민 주도로 만들 수는 없을까. 아이슬란드 국민은 2008년 금융위기가 정치권의 모럴 해저드 때문이라 보고 도덕적 혁신을 위해 헌법의 기본 가치부터 새롭게 정립하는 헌법 개정을 요구했다. 2009년 집권한 새 정부는 헌법 개정을 위한 특별위원회로서 헌법심의회(Constitutional Council)를 전원 비정치권 인사 25인으로 구성했다. 이 심의회가 주축이 된 헌법 개정 심의 과정은 웹사이트와 함께 페이스북·트위터·유튜브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실시간으로 시민들과 공유됐고, 시민들은 댓글·트위터·e메일·우편 등으로 토론에 참여하고 피드백을 받았다. 아이슬란드의 개헌 과정은 인터넷과 SNS를 활용한 쌍방향 의사소통을 통해 헌법 개정안을 작성한 최초의 사례로 세계적 주목을 받았다.

한국은 세계가 인정한 정보기술(IT) 강국이며 인터넷이 전 국민에게 보급돼 있다. 헌법 개정을 국민 주도로 진행하는 데 필요한 기술적 기반이 확보돼 있다. 온라인 플랫폼을 구축해 국민의 의견을 수렴하면 될 것이다. 문제는 헌법 개정을 리드할 기구인데 문재인 대통령은 선거기간 중 이미 ‘국민 중심의 개헌 원칙’ 아래 정부에 개헌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특위 산하에 국민의 의견을 대대적으로 수렴하기 위한 ‘국민 참여 개헌논의기구’를 설치하겠다고 약속했다. 따라서 이 공약이 실천에 옮겨지기만 한다면 오프라인 플랫폼의 구축도 문제없을 것이다. 개헌특위와 국민개헌기구를 중심으로 하고 온라인·오프라인을 활용하여 국민의 의사를 수렴해 그 의사에 따라 개헌이 추진될 것으로 국민은 믿고 있다.

민주화 이후 정권이 바뀔 때마다 개헌 논쟁이 주기적으로 반복돼 왔다. 대부분 당시 정치세력들의 이해관계가 반영된 소모적인 논쟁이었다. 역대 국회에서도 의장 직속으로 개헌특위가 설치되곤 했는데 대부분 단기간에 개헌 쟁점을 스크린하는 데 그쳤다는 인상을 준다. 현재도 국회에 개헌특위가 설치돼 활동 중인데 정치권이 중심이 되고 국민은 형식적으로 참여하는 모양새다. 개헌특위 위원 전원이 국회의원이고 자문기구도 그 성격이 모호할 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의 참여가 제대로 이뤄지고 있지 못하다. 정치권 중심의 개헌 논의는 매번 통치 구조니, 정부 형태니 하면서 정치권의 권력게임 룰에만 집중해 왔다. 대한민국이 미래지향적으로 추구해야 할 헌법적 가치들이 무엇인지를 우선 결정하고, 다음으로 국민 생활에 직접 영향을 주는 영역에서 필요한 사항들을 검토한 후, 마지막으로 권력 구조 문제를 따져도 늦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매번 정치권에서는 역순으로 일을 하거나 권력 구조 외에는 통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정치권에만 개헌 문제를 맡겨 놓을 수 없는 이유다.

촛불혁명은 끝나지 않았다. 지금부터는 국민이 자신과 나라의 미래를 동일시하면서 새로운 대한민국을 설계하는 일에 나설 수 있도록 기구를 정비하고 절차를 만들고 실제로 가동시키는 일이 시작돼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자신을 촛불혁명을 완성할 도구로 써 달라고 국민에게 호소했다. 국민은 그를 선택했다. 이제 그가 답할 차례다.

김선택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