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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포드“아버지는 20세 생일 밤 백병전으로 중공군 포위망 뚫었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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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조지프 던포드 미 합참의장(왼쪽 첫째)과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오른쪽 둘째)이 4일 장진호 전투 기념비 제막식에 참석해 기념비를 바라보고 있다. [사진 트위터]

조지프 던포드 미 합참의장(왼쪽 첫째)과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오른쪽 둘째)이 4일 장진호 전투 기념비 제막식에 참석해 기념비를 바라보고 있다. [사진 트위터]

지난 4일(현지시간) 미국 버지니아주의 해병대박물관 강당에 마련된 연단에 조지프 던포드 합참의장이 섰다. 1950년 겨울 혹한의 날씨 속에 중공군 7개 사단 12만여 명의 포위를 돌파하기 위해 미군 1해병사단 및 육군 7사단의 3개 대대 등 1만8000여 명이 백병전을 벌였던 장진호 전투를 기념하는 기념비 제막식이었다.

장진호 전투 기념비 제막식 연설 #“내가 해병 된 건 당시 그분들 영향” #기념비 상단엔 ‘고토리의 별’ 형상 #던포드 부친 등 양국 250명 참석

던포드 합참의장은 연설 도중 아버지 얘기를 꺼냈다. 던포드 합참의장의 부친 조지프 던포드 시니어는 장진호 전투 현장에 있었던 한국전 참전용사다. 던포드 합참의장은 “내가 해병이 된 것도 장진호 전투에서 싸운 해병들의 영향을 받아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며 “해병으로서의 내가 성공했다면 그건 이들의 거대한 발자취를 따르려 노력한 결과”라고 말했다. 던포드 합참의장은 “그들은 가장 엄혹한 지형과 혹독한 날씨 속에서 싸웠다”고 말했다. 이어 “아버지는 중공군 79사단의 3개 연대가 미군을 전멸시키려 나섰던 그날 밤 백병전으로 싸웠다”고 강조했다. 그날 밤은 던포드 합참의장의 부친이 20세 생일을 맞은 50년 11월 27일이었다.

던포드 합참의장은 성인이 될 때까지 부친으로부터 그날의 회고를 듣지 못했다. 그는 “아버지는 자신과 해병들이 바다 쪽으로 진군하면서 겪었던 백병전의 공포와 동상을 결코 말하지 않으셨다”며 “내가 해병이 된 지 7년이 지나서야 아버지와 한국전쟁에 대해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눴다”고 알렸다. 던포드 합참의장은 “저는 지금도 아버지가 오래 전에 세워 놓았던 기준을 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도 모든 해병이 이 전투를 배우고 있다”고 덧붙였다. 연설 중간중간마다 행사장에 자리한 한국전쟁 참전용사 등 한·미 양국 인사들의 박수가 이어졌다. 이 자리엔 던포드 합참의장의 부친도 참석했다.

장진호 전투는 미 해병이 치른 격전의 하나였다.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맞서 미군 사상자는 1만2000여 명이나 됐다.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을 돌파한 뒤 미군이 도달해 집결한 ‘바다 쪽’은 흥남이었다. 영화 ‘국제시장’의 한 장면인 흥남 철수는 이렇게 시작됐다. 미군이 피난민을 함정과 수송선에 태워 남으로 내려 보낸 세계 전사에서 전례를 찾기 어려운 작전이었다.

던포드 합참의장에 앞서 축사에 나선 안호영 주미한국대사는 “장진호 전투를 통해 10만 명의 피난민을 남으로 내려보내는 흥남 철수작전이 가능했다”고 참석자들에게 알렸다. 안 대사는 “당시 미군의 에드워드 아먼드 사령관은 미군 함정에 실려 있던 무기와 물자를 버리고 대신 사람을 태웠다”며 “이같은 휴머니즘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날 해병대박물관에 모습을 드러낸 장진호전투기념비에는 ‘장진(초신)호수 전투’로 영문 표기돼 있다. 원래 미국 내에선 장진호 전투가 일본식 표기인 초신(Chosin) 전투로 알려져 있다. 한국전쟁 당시 일본이 만들었던 지도를 미군이 사용하면서다. 하지만 이번에 기념비를 건립하면서 한국 측의 요청으로 공식 이름에 장진(Jangjin)을 앞세웠다.

기념비의 상단에는 별 모양의 상징물이 자리하고 있다. 이는 ‘고토리의 별’로 장진호 인근인 고토리에 떴던 별을 뜻한다. 포위당했던 미군이 철군을 앞둔 밤 갑자기 눈보라가 개이고 별이 떠올랐던 일화로 인해 ‘고토리의 별’은 장진호 전투를 상징하게 됐다.

이날 행사에는 기념비 건립을 주도했던 스티브 옴스테드 예비역 중장, 박승춘 국가보훈처장 등 한·미 양국 인사들과 한국전쟁 참전용사 등 250여 명이 참석했다.

◆장진호 전투

함경남도 개마고원 장진호에서 미 해병·육군 병사 1만8000명과 12만의 중공군 인해전술에 맞서 싸운 전투. 1950년 11월 26일부터 17일간 1만2000여 명의 미군 사상자가 나왔다. 미군 생존자가 적어 이들을 초슨퓨(Chosen Few)라고도 불렀다. 미군 전사상 ‘가장 고전했던 전투’로 기록돼 있다.

버지니아주 트라이앵글=채병건 특파원 mfemc@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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