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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대기업 바로잡겠다는 대선공약의 모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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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임미진 산업부 기자

임미진 산업부 기자

1~5번 대선 주자들의 대기업 관련 공약은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를 제외하면 비슷비슷하다. “재벌 총수들의 불법 행위를 엄단하겠다”, “불법 승계를 못 하게 하겠다”고 입을 모은다. 대기업 대신 중소기업과 벤처 기업을 육성해야 나라의 미래가 있다고도 주장한다. 경제학 박사 출신인 유승민 바른정당 대선 후보는 “삼성과 현대차는 지난 20년간 혁신을 게을리했다”며 “대통령이 되더라도 재벌 대기업은 만나지 않겠다”고도 했다.

불법 행위를 엄단한다는 데야 이론이 있을 수 없다. 가뜩이나 최순실 사태로 대기업에 대한 국민감정도 상했다. 대선 후보들이 연일 “대기업 적폐 청산”을 외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대기업을 바로잡겠다”고 하면 국민 귀에 듣기 좋을 거라 여기는 게다.

문제는 대기업이 바뀌면 우리나라의 정경 유착이 사라지냐는 것이다. 최순실 사태의 책임이 대기업에만 있다면 그럴 테다.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우리 편의를 봐달라”며 돈 보따리를 권력 측근에 찔러넣은 것이 이 사태의 핵심이라면 말이다.

지금까지의 검찰 수사에서 밝혀진 그림은 그렇지 않다. 권력 실세가 기업들에 전화를 돌려 “재단 후원금을 내라”고 종용했다. 대통령 독대를 통해 민원을 해결해주겠다는 것은 그 미끼였다. 정권에 밉보인 대기업은 어떻게 최고 경영진까지 사퇴 압력을 받게 되는지도 수사를 통해 드러났다.

정치권이 스스로 변하지 않고선 정경유착의 관행은 해소되지 않는다. 그런데 당선되면 어떤 식으로 정치권력의 기업 주머니 털기를 중단시킬 건지 약속하는 후보는 없다. 대기업이 세금처럼 여기저기 출연하는 준조세를 없애겠다고 약속했던 한 후보는 공약집에서 이런 내용을 슬그머니 빼기도 했다. “대기업의 준조세 규모가 법인세의 36%에 달하는데 어떻게 감당하려느냐”는 반대 여론을 의식한 것이다.

수출 시장엔 모처럼 봄바람이 불고 있다. 올 들어 3월까지 가장 많이 해외로 나간 제품은 반도체(202억 달러), 다음 제품은 자동차(102억 달러)다. 두 제품을 합치면 전체 수출의 23%에 달한다. “20년간 혁신을 게을리했다”는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가 실상 우리 수출을 이끌고 있는 것이다. 대선 주자들이 “가슴 아프다”고 입을 모으는 청년 실업자들이 가장 가고 싶어하는 회사도 이들 대기업이다.

우리 경제에서 차지하는 대기업의 역할을 인정하지 않고 어떻게 경제 발전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인가. 대기업과 관련해 좀더 솔직하고 현실성있는 공약을 듣고 싶다.

임미진 산업부 기자 mi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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