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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하겠다는 말은 살려달라는 호소, 얘기 들어주면 풀리기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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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여보, 전화 좀 받아봐요. 남자를 바꿔 달라네요.”

‘생명의전화’ 상담 23년 김수현씨 #기업 임원 퇴직 후 봉사로 제2인생 #스트레스로 심장 이상 생겼지만 #할 수 있을 때까지 하기로 결심

1994년 어느 날, 생명의전화에서 상담 봉사를 하던 아내 우현숙(66)씨가 갑자기 상담실에서 나와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김수현(67)씨에게 부탁했다. 마침 그곳엔 남자가 김씨 한 명뿐이었다. 얼결에 전화를 넘겨받아 상담을 했다. 전화를 끊자 아내가 그를 보며 감탄했다. “전화 아주 잘 받네요.”

“그때 이상하게 뭐가 씐 듯한 기분이었어요. 그래서 전문교육을 받고 상담 봉사를 시작했지요.”

김수현씨가 26일 서울 성북구 생명의전화 상담실에서 전화상담을 하고 있다. 23년간 상담 봉사를 한 그는 장기봉사의 공을 인정받아 지난 20일 삼성생명으로부터 ‘컨설턴트 사회공헌상’을 받았다. [최정동 기자]

김수현씨가 26일 서울 성북구 생명의전화 상담실에서 전화상담을 하고 있다. 23년간 상담 봉사를 한 그는장기봉사의 공을 인정받아 지난 20일 삼성생명으로부터 ‘컨설턴트 사회공헌상’을 받았다. [최정동 기자]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나와 한국쓰리엠에서 근무한 김수현씨는 성공한 샐러리맨이었다. ‘내가 사회로부터 혜택받은 것을 돌려줘야겠다’는 사명감이 있었다. 한 달에 두 번 토요일을 반납하며 열심히 봉사했다. 한국쓰리엠에서 한국인으로 올라갈 수 있는 최고 직책인 부사장까지 올랐지만, 봉사를 거르지 않았다. 퇴직 뒤 삼성생명 보험 컨설턴트로 제2인생을 시작해 성공한 컨설턴트의 상징인 ‘백만달러원탁회의(MDRT)’ 회원에 5회 연속(2011~15년) 오르면서도 봉사를 이어갔다. 그런데 봉사를 하면 할수록 몸과 마음이 지쳐갔다.

“부부·자녀·대인관계·직장·질병·정신병·성. 생명의전화 상담에선 모든 문제들이 다 나오고 사회의 어두운 분야를 속속들이 다 알게 됩니다. 모르고 살면 편한데 너무 힘들더라고요.”

상대방을 야단칠 수도, 먼저 전화를 끊어버릴 수도 없이 하루 10통 넘는 상담을 진행해야 한다는 점이 스트레스였다. 가장 괴로운 건 “이 전화하고서 죽겠다”고 말하는 자살 위기자의 전화였다. 자칫 상담을 잘못하면 이 사람이 정말 죽으러 갈 수 있다는 부담감이 온몸을 짓눌렀다.

상담 내용은 절대 외부에 발설할 수 없다. 상담실을 나오는 동시에 싹 잊어버리려고 하지만 스트레스가 가시지 않았다. 4년 먼저 봉사를 시작했던 아내는 힘들어서 그만둔 지 오래였다. 그와 같은 시기에 봉사에 입문했던 40명 중 남은 사람은 그를 포함 2명뿐이었다. 2014년 생명의전화로부터 20년 장기봉사상을 받았지만 ‘정말 힘들다. 내가 이걸 왜 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2015년 어느 날, 문제가 터지고 말았다. 심장의 이상이었다.

2015년 4월 심장에 스탠트를 5개 삽입 했다. 의사는 그가 술·담배 안 하고 매일 운동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혹시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시나요”라고 물었다. 그의 머릿속에 한 가지가 떠올랐다. 아, 생명의전화 봉사.

몸이 아프니 다 관두고 싶었다. 봉사도 보험도 모두 정리하고 공기 좋은 시골에 내려가 살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아내는 기왕 마음먹은 일이니 포기하지 말고 좀 더 해보자고 그를 독려했다. 삼성생명의 젊은 컨설턴트들도 “계속 나오셔서 어른 역할을 해달라”고 붙잡았다. 결국 마음을 고쳐 먹었다. “생명의전화 봉사는 할 수 있는 데까지 가기로 했습니다. 보험도 회사가 나가라고 할 때까지 가보려고요.”

최근엔 한 달에 한 번 생명의전화 상담을 한다. 과거엔 가족·대인관계 고민이 주를 이뤘다면 최근엔 경제적 어려움을 호소하는 전화가 많아졌다. 상당수 고민은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해결되기도 한다. 하루 10통 중 1~2통은 상대편의 “고맙다”는 말로 상담이 끝난다. 힘이 드는 만큼 얻는 보람도 크다. “전화해서 ‘자살하겠다’고 말한다는 건 곧 ‘나를 살려달라’는 의미잖아요. 주위 누구에게도 말 못하는 고민을 들어줄 사람이 있다는 건 그들에게 큰 힘이 되지요.”

그는 장기봉사의 공을 인정받아 지난 20일 삼성생명으로부터 ‘컨설턴트 사회공헌상’을 받았다. 그는 봉사에 관심 있는 반퇴·은퇴자들에게 현실적인 조언을 했다. “봉사나 한 번 해볼까 정도의 생각으로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단단한 마음가짐을 가진 뒤에 시작하세요.”

한애란 기자 aeyan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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