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갈아 만드는 방송”…성폭력, 박봉에 시달리는 방송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우리가 원하는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이미 지쳐 있는 노동자들을 독촉하고 등 떠밀고. 제가 가장 경멸했던 삶이기에 더 이어 가긴 어려웠어요."

지난해 10월 이같은 유서를 남기고 자살한 tvN '혼술남녀' 이한빛 조연출의 죽음이 뒤늦게 주목 받고 있다. 이한빛 조연출은 드라마 촬영을 위해 55일간 이틀밖에 쉬지 못했다고 한다. 방송가 자살사건은 처음이 아니다. 지난 2008년에는 SBS '긴급출동 SOS'의 막내작가였던 김모(23·여)씨가 열악한 근무 환경 등의 이유로 SBS 목동 사옥 23층에서 투신 자살했다.
1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현실은 여전하다. 열악한 방송가의 제작 환경을 알아봤다. 직종에 따라 상황이 달라 예능·교양 프로그램의 방송작가 중심으로 살펴봤다. 취재원 대부분이 관련 업종에 있어 익명으로 기사에 인용했다.

지난해 10월 종영한 tvN 드라마 '혼술남녀' [사진 tvN]

지난해 10월 종영한 tvN 드라마 '혼술남녀' [사진 tvN]

최근까지 한 지상파 다큐 프로그램의 작가로 6개월간 일한 A(27)씨는 당시 정해진 출퇴근 시간이 따로 없었다. 일주일 내내 시키는 대로 일하고 퇴근해야 했다. 야외 촬영이 있는 주에는 월요일 새벽에 출근해 수요일 저녁이 넘어서야 퇴근했다. "밥 값 제대로 못하면 바로 잘라버릴 줄 알라"란 소리는 매일 같이 들었다. 그렇게 일하고도 한 달 100만원 정도 받았다. A씨는 "첫 출근하며 조연출에게 월급을 물어봤더니 "그걸 왜 물어보느냐"고 하더라"며 "월급 들어오는 날도 다른 팀 막내작가에서 물어봐서 알았다"고 말했다.

tvN 이한빛 조연출 자살로 열악한 방송 제작 환경 주목 #박봉·성폭력에 시달려도 문제제기 못 해 #'프리랜서'로 법적 보호 사각지대 #제작비 한계에 후려칠 건 프리랜서 보수뿐

◇박봉에 시달리는 작가들 

적지 않은 방송작가들은 '박봉'과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고 있다. 예능·교양 프로그램 작가(구성작가) 중심으로 구성된 방송작가 유니온의 지난해 보고서에 따르면 응답자 590명 가운데 119명(20.2%)가 주당 68시간 이상 일한다고 응답했다. 응답자 641명 중 320명(49.9%)이 월 150만원 미만을 받았다. 작가는 전체 대본을 총괄하는 메인작가와 코너를 맡는 서브 작가, 자료 조사 및 일반인 섭외와 프리뷰(촬영 화면을 텍스트로 옮기는 작업)를 하는 막내 작가로 나뉜다. 막내의 경우 상황은 더 심각하다. 한 케이블 방송의 주 단위 교양오락 프로그램 제작에 막내작가로 참여했던 B(27)씨는 주급으로 20만원을 받았다. 하루 13~15시간 씩 일주일에 5일 일했고, 쉬는 날에도 집에서 일할 때가 많았다. B씨는 "방송일 특성상 일이 많은 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그에 따른 처우가 열악해도 너무 열악하다"고 말했다.

여성이 많은 작가들은 상시적인 성폭력 위험에도 노출돼 있다. 2015년 한 외주 제작사의 조연출로 한 지상파의 다큐멘터리 제작에 참여했던 C(25)씨는 첫 회식 자리에서 한 지상파 방송 CP(책임프로듀서)에게 성추행을 당했다. CP는 C씨의 옆자리에 와 손을 잡고 허벅지 위로 손을 얹었다. C씨는 "그 일로 혼자 화장실에서 울고 있으니 선배 작가가 '뭐 이런 일로 울고 그러느냐. 이러면 앞으로 이 일 못한다'고 다그쳐 더 서러웠다"고 말했다. C씨는 얼마 후 야외촬영에서 또 한 번 황당한 일을 겪었다. 이번엔 메인PD였다. C씨는 "야외 촬영이 끝난 뒤 숙소에서 잠 자려는데 메인PD가 술 취한 채 다짜고짜 방으로 들어와 복도에 숨어 있었다"고 말했다.
9년차 방송작가 D(32)씨는 "작가 생활 중 못 들을 말 다 들어봤다. 어떤 PD는 다 같이 있는 자리에서 '피곤해보이는데 고기주사(성 행위 의미) 필요하면 말하라'고 얘기하더라"며 "문제제기를 하면 되지 않느냐고 하지만 그게 쉽지 않다"고 말했다.

방송작가들이 문제제기 못하는 이유는 이들이 프리랜서로 불리는 특수형태근로종사자이기 때문이다. 이때문에 근로기준법, 최저임금법 등 최소한의 법적 보호를 받으려면 법정 소송까지 가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계약서 없이 일하다 말 한마디로 잘려도 당장 하소연할 데가 없다. 한 종편에서 보도프로그램 작가로 일하고 있는 E(27)씨는 "워낙 좁은 바닥이다보니 문제제기 했다 소문이 안 좋게 날 수도 있다. 면접 본 뒤 출근하라고 했다가 갑자기 이유에 대한 설명없이 '출근하지 마라'고 전화 받은 작가도 봤다"고 말했다.

◇법적 보호 못 받는 프리랜서

이같은 열악한 근로환경이 부족한 제작비에서 온다는 지적도 있다. 한 지상파 드라마 PD는 "예능과 일일드라마는 평균 5000만원, 미니시리즈는 2억5000만원 정도로 회당 제작비 한도가 있는데 스타 작가·배우들은 회 당 몇 천 만원씩 가져간다. 어쩔 수 없이 프리랜서 보수를 낮게 후려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유료 방송의 6년차 예능 PD는 "제작비를 합리적으로 줘 필요한 만큼 쓰면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 작가 뿐 아니라 조연출이나 스태프 등 다른 프리랜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끼리는 쥐어짜는 걸 넘어 '사람 갈아서 프로그램 만든다'고 한다"고 말했다.

방송작가 노조를 준비 중인 황진영 방송작가유니온(준) 집행위원은 "단기적으로는 '원래 작가 일이 그런 것'이라며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방송가 인식부터 바꾸는 노력이 선행돼야 하며, 장기적으로는 방송작가들도 최저임금제나 노동 3권 등 최소한의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노진호 기자 yesno@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