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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을 두려워하는 그대에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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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7호 30면

[꽃중년 프로젝트 사전] ‘뽑다’

개나리가 필 무렵이면 새로운 교실에서 새 친구들이 한 학기 반장을 뽑는다. 매년, 매학기 오는 반장선거지만, 봄 교실에는 묘한 설렘이 가득하다. 반장 선거 날은 하얀 스타킹에 예쁜 구두를 신고 온 친구의 발이 유난히 눈에 들어온다. 친구 얼굴엔 아침 내내 거울 앞에 서 있다 왔다고 쓰여 있다.

입후보자가 나서고, 공부 잘하는 학생을 향한 선생님의 무언의 응원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떡볶이로 유혹하거나 ‘남(여)학교로 바로 갈 수 있는 육교를 놓겠다’, ‘조인트 소풍을 가겠다’는 호기로운 공약을 내건 친구들이 당선되기도 한다. 학생이 육교를 어찌 놓겠나, 그래도 손뼉을 치며, 손나팔로 호응하며 뽑는다. 한 학기 우리가 뽑은 반장의 리더십 스타일에 따라 만우절은 꽃중년들에게 소중한 추억의 한 컷이기도 하고, 스승의 날, 체육대회, 친구들끼리의 놀이도 참 많이 다른 풍경으로 기억되고 있다.

곧 대한민국 ‘반장’을 뽑는다. 다들 선거에 관심이 쏠려 있다. 그것도 두 달 만에 나라를 이끌 최고 리더를 뽑아야 하니 더 북새통이다. ‘벚꽃 대선’, ‘장미 대선’이라나? 애꿎은 꽃들이 고생이지, 이번 봄엔 꽃중년들 꽃놀이 할 마음의 여유도 사라졌다. 추운 겨울 치러지던 대선이 갑자기 봄으로 옮겨 왔지만, 겨울보다 무겁다. 학창시절 반장 선거의 축제 분위기와 거리가 먼 중압감이 꽃중년들의 마음을 누른다. 중간 세대, 낀 세대인 우리 꽃중년들의 마음은 아직 봄이 아니다. 무거운 마음, 미안한 마음, 불안한 마음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교차한다.

대부분의 학창시절 동안 괴짜의 이변이 아니고서 반장은 선생님 일을 돕거나 모범생들끼리의 세상에 있기 때문에 누가 되든 크게 관심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대통령도 그랬다. 대통령보다는 꽃중년으로 넘어오는 세월의 무게가 더 컸다.

그런데 올 봄 꽃중년들의 마음이 분주하다. 누구를 뽑을까? 고대 그리스에서는 추첨으로 관직을 뽑았다는데, 차라리 제비뽑기가 낫지 않을까? 아니다. 그래도 내 손으로 뽑아야겠다. 그런데 내가 뽑는 후보가 될까? 차선을 뽑아야 하나? 그런데, 잘할까, 정말?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두렵다. 그렇지만 5월 9일에는 누군가를 뽑아야 한다. 검증 지표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판단이 잘 서지 않는다. 장밋빛 공약이 다 지켜졌다면 한국 사회가 훨씬 나아졌겠지.

옛 선인들의 말에서 답을 찾아본다. 세종조에 대사헌 이지강은 “법이란 천하고금이 공(公)을 공유·공용하는 방도이지, 전하가 사유·사용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아뢰었다. 세종은 이 충신을 벌하지 않고 중시했다.

또 영조 16년 부사직 오광운은 “정인(正人)·군자(君子)는 시비(是非)라는 두 글자를 내어 놓아 천지 사이에 그대로 있게 한 다음 공공(公共)의 의논에 맡겨야 한다”고 아뢰었다.

이런 리더십을 가진 자를 가려보는 것은 어떨까. 법을 자기 마음대로 좌지우지 하지 않고, 시비는 천지의 공론에 기꺼이 맡기는 리더십 말이다.

뽑자, 뽑아 버리자. 뽑지 않고 후회하기 보다는 뽑아 보자. 그리고 뽑는 김에 할 수만 있다면 꽃중년의 삶을 우울하게 만드는 것들도 같이 뽑아 버리자. 공연한 걱정, 괜한 권위의식은 다 뽑아 버리고, 사춘기 딸의 고민을 들어주는 아빠, 아들과 어깨동무하고 산책하는 엄마가 되어 보자.

허은아

허은아

허은아 (주)디아이덴티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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