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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변심에 뚫리려다 만 박스피…이유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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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외국인이 변심했다. 첫사랑을 걷어찬 여심처럼 매섭게 돌아섰다. 올해 들어 무서운 속도로 국내 주식을 사들였던 외국인 투자자가 이달부터 작심한 듯 주식을 내다 팔고 있다.

이달 내내 총 4800억 팔아치운 외국인 #지정학적 위험·원화 약세 겹쳐 투자매력 하락 #저평가·실적개선 등 체질 좋아 "6월말쯤 내다봐야" #외국인 영향력 덜한 종목 눈여겨 볼만

외국인 투자자는 이달 들어 11일까지 코스피 종목 4800억원어치를 팔아치웠다. 최근 4개월간 7조4720억원어치 사더니 방향을 180도 틀었다. 이달 장이 열린 7거래일 내내 주식을 팔아치웠다. 지난해 1월 14거래일 연속 순매도한 뒤로 가장 긴 기록이다. 올해 주가 상승을 이끌었던 외국인이 갑자기 발을 빼면서 코스피도 맥을 추지 못하고 있다. 6거래일을 내리 내렸다. 11일도 전날보다 9.47포인트(0.44%) 내린 2123.85로 마감했다.

우선 시장 참가자들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멀어지기 시작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탐탁잖은 신부(트럼프)를 맞은 미국 증시가 한때 기대감에 빠졌지만 이제 실망으로 돌아서고 있다"며 "신혼은 끝났다"고 지적했다. 트럼프 당선 후 지난달 1일까지 뉴욕 증시에서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 지수는 12% 올랐지만 최근 상승세가 뚜렷하게 꺾였다. 트럼프의 정책 추진력에 의심이 생기며 달아올랐던 글로벌 투자심리도 위축됐다.

지난해 하반기 오르기 시작한 글로벌 물가지수도 주춤했다. 물가가 오를 땐 위험자산을 선호하기 때문에 올 초 신흥국 증시가 주목 받았다. 그러나 이달 들어 한국을 비롯한 인도, 대만을 중심으로 자금 유입 속도가 급속히 느려졌다.

지정학적 위험도 발목을 잡았다. 북한 추가 핵실험 가능성이 커지는 가운데 미국 항공모함 칼빈슨호가 한반도 해역으로 이동하면서 투자자 불안 심리가 커졌다. 공포지수로 불리는 코스피 변동성지수(VKOSPI)는 이날 연고점인 16.68로 치솟았다. 이현주 NH투자증권 연구원은 "북한 추가 도발이 예상되면서 당분간 북한 위험은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여태까지 외국인을 유혹했던 원화 강세도 멈췄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보유 자산을 줄이기로 한 것이 달러화 강세를 불러왔다. 원화 강세, 달러화 약세일 때 환차익을 낼 수 있는 외국인에겐 국내 주식 투자 유인이 줄었다. 달러당 원화가치는 올들어 3월까지 7.4% 급등했지만 이달 들어서만 2.7% 내렸다. 이달 미국 재무부가 환율조작국 보고서를 내면 원화 약세는 가속화할 전망이다. 송승연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당분간 달러를 약세(원화 강세)로 바꿀 요인은 많지 않다"며 "미국이 보유 채권을 줄이면 금리 상승 압력이 커지고 이는 달러 강세로 연결된다"고 말했다.

이 같은 요인이 겹치면서 지난달 고조됐던 박스피(박스권에 갇힌 코스피) 돌파 기대감은 멀어지고 있다. 빈자리를 메울 주체가 없기 때문이다. 지난해부터 주식 매수세가 약해진 기관투자자는 외국인의 빈자리를 메우기 역부족이라는 평가가 많다. 김영일 대신증권 마켓전략실 팀장은 "박스피를 뚫으려면 강한 매수세가 필요한데 기관투자자가 외국인 만큼 주식을 집중적으로 사들이기엔 한계가 있다"며 "달러 강세가 주춤해질 것으로 보이는 6월 말 쯤에야 박스피 돌파를 가늠해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나마 외국인이 완전히 돌아섰다고 하긴 이르다. 국내 증시는 가격 면에서 여전히 매력적인 투자처다. 메리츠종금증권에 따르면 주가가 주당 수익의 몇배인지 보여주는 12개월 선행 주가수익비율(PER)은 한국이 9.7배다. 신흥국 증시 평균(12.2배)은 물론 선진국(16.5배)보다 낮다. 그에 반해 올해 국내 기업 실적은 크게 개선될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 기업의 이익 증가율 전망치는 28%로 신흥국(18.5%)과 선진국(12.3%) 평균보다 크게 높다.

단기 투자 전략 변화도 불가피하다. 정다이 메리츠종금증권 연구원은 "지난해 2월 이후 지수를 따르는(패시브) 외국인의 투자금이 코스피 상승을 주도해 왔지만 이제 영향력이 줄어들고 있다"며 "대신 외국인 영향을 덜 받고 성장 가능성이 큰(액티브) 종목, 가령 한화생명, 기아차, 고려아연 등이 단기적으로 유망해보인다"고 말했다.


이새누리 기자 newworld@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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