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리한 연출이 숨긴 개인주의의 음모

중앙일보

입력

이보 반 호브 연극 '파운틴헤드'의 서울 공연 장면. 스크린을 통해 배우가 그리는 도면이 중계되고 있다. 영상기술을 활용한 이보 반 호브 연극의 특징이 가장 드러나는 장면이다. [사진 LG아트센터]

이보 반 호브 연극 '파운틴헤드'의 서울 공연 장면. 스크린을 통해 배우가 그리는 도면이 중계되고 있다. 영상기술을 활용한 이보 반 호브 연극의 특징이 가장 드러나는 장면이다. [사진 LG아트센터]

전 세계가 열광하는 연극 연출가 이보 반 호브(Ivo van Hoveㆍ59)의 ‘파운틴헤드’가 서울 공연을 마쳤다. 지난달 31일부터 지난 2일까지 LG아트센터에서 사흘간 공연됐던 ‘파운틴헤드’는 전 좌석 매진 기록을 세우고 화려한 막을 내렸다.  
 지난 2일 마지막 공연을 지켜봤다. 공연시간 4시간은 짧지 않았지만, 강렬했던 인상은 한동안 가시지 않았다. 막이 내려가자 기립박수를 보내는 관객도 꽤 있었다.

사흘간 전 좌석 매진 끝에 막 내린 화제작 '파운틴헤드' #온갖 형식 실험 펼치며 4시간 공연시간 꽉 채워 #승자의 논리 강요하는 주제는 동의 어려워

 # 영리한 연출, 기발한 연극
 소문처럼 이보 반 호브는 영리한 연출가였다. 쉽게 말해 ‘관객과의 밀당’을 즐길 줄 알았다. 이보 반 호브는 끊임없이 관객에게 장난을 걸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다양한 방식의 선 넘기 작업, 그러니까 연극 장르의 경계를 허무는 온갖 시도가 한 편의 연극에서 펼쳐졌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었다.
 1막이 끝날 무렵 ‘쿵’ 하는 효과음과 함께 무대 중앙의 스크린에 ‘중간휴식’ 네 글자가 떴다. 자막을 보고 몇몇 관객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무대 위 배우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객석 뒤 스텝을 향해 손짓을 했다. 그리고 다시 연기를 시작했다. 막이 내리기 전 휴식 자막이 잘못 나간 돌발사고였다. 아니 사고인 줄 알았다. 2막이 끝날 무렵에도 같은 사고가 발생했고, 그때야 반복된 사고가 연출의 의도란 걸 알았다.
 이른바 ‘낯설게 하기’의 전형적인 수법이었다. 관객에게 ‘당신은 지금 연극을 보고 있다’는 현실을 끊임없이 주입하는 브레히트의 ‘이격(detachment) 효과’ 말이다. 공연이 시작하기 전 무대에서 배우들이 어슬렁댔던 장면, 배우들이 관객에게 말을 거는 장면도 같은 효과를 노린 연출의 작전이었다. 악사 2명이 무대에 올라와 배우인 양 연주를 하거나, 스텝이 소품을 옮기는 장면을 그대로 노출한 것도 신선하고 재기 발랄한 시도였다.
 이보 반 호브의 형식 실험은 이미 정평이 나 있다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효과가 더 커 보였다. 연극 ‘파운틴헤드’는 의외로 TV 연속극 같았다. 작품 줄거리나 배우의 연기 모두 사실적이었다. 너무 사실적이어서 연극 특유의 설정이나 과장된 연기가 보이지 않았다. 우리네 일상을 담담히 표현하는 사실주의 영화나 시시콜콜한 하루를 들여다보는 일일연속극처럼 인물들은 일상에서 만나고 부딪히고 싸우고 사랑하고 헤어졌다. 연극이 끝내 말하려는 바가 짐짓 무거운 것이라 해도, 주제를 담은 서사는 오늘 아침 출근길의 광화문 거리처럼 무난하게 흘러갔다. 
 이 평화로운 이야기 전개를 이보 반 호브는 참을 수 없었나 보다. 이야기가 익숙해질 즈음이면, 뜬금없는 무언가가 튀어나와 주위를 환기시켰다. ‘정신 차려! 당신은 지금 연극을 보고 있다고!’ 하고 말이다. 

연극 '파운틴헤드' 서울 공연 장면. 천재 건축가 로크가 도면에 그림을 그리고 있다. [사진 LG아트센터]

연극 '파운틴헤드' 서울 공연 장면. 천재 건축가 로크가 도면에 그림을 그리고 있다. [사진 LG아트센터]

 흥미로운 건 역시 영상이었다. 천장에 설치한 카메라 6대가 4시간 내내 무대를 내리찍었다. 그 화면이 무대에 설치된 스크린에서 동시간에 재현됐다. 하워드 로크가 도면에 그림을 그리는 장면(로크의 그림 솜씨에 놀랐다), 무대 뒤편에서 벌어진 로크와 도미니크 프랭컨의 전라 정사장면(19세 이상 관람 가능이란 걸 나중에 알았다) 등이 실황 중계됐다.
 스크린은 배우를 외면하기도 했다. 연기 중인 배우를 무시하고 무대의 다른 공간을 보여줬다. 영화가 화면을 분할해 보여주는 것처럼, 무대에서 독립된 두 장면이 동시에 펼쳐졌다. 관객으로서는 기이한 경험이었지만, 영상을 통한 효율적인 메시지 전달을 노렸다면 성공이라 할 수 있었다. 영상이 없었으면 두 장면이 순서대로 배치돼야 하기 때문이었다.
 관객으로서는 4시간이 바빴다. 오케스트라 피트까지 확장해 무대가 넓고 깊었는데, 이 거대한 공간에서 여러 사건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배우 연기 보느라, 스크린 영상 보느라, 한글 자막 읽느라 정신이 없었다. 솔직히 배우 연기보다 천장에 붙은 자막 스크린을 올려다보는 시간이 더 많았다. 관객 입장에서는 7시간을 지켜봤던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보다 체력 소모가 더 많았다. 연출이 펼쳐놓은 세상에 끌려다니다 보니 어느새 연극은 끝나 있었다. 일방적으로 연출에게 당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보 반 호브는 확실히 관객 머리 위에 있었다.

연극 '파운틴헤드' 서울 공연 장면. 오케스트라 피트까지 확장해 무대를 최대한 넓혔다. 한 무대에서 여러 상황이 동시에 벌어진다. [사진 LG아트센터]

연극 '파운틴헤드' 서울 공연 장면. 오케스트라 피트까지 확장해 무대를 최대한 넓혔다. 한 무대에서 여러 상황이 동시에 벌어진다. [사진 LG아트센터]

 # 소설과 연극
 2014년 ‘파운틴헤드’가 네덜란드에서 첫선을 보였을 때 우려를 표명한 외신들이 있었다. 아인 랜드(Ayn Randㆍ1905∼82)의 원작 소설이 일방적인 가치를 전파하고 있어서였다. 아인 랜드가 1943년 발표한 동명 소설은 개인주의, 나아가 자유주의를 주장한 고전이었다. 아인 랜드의 소설은 미국의 신자유주의에 사상적 근거를 제공한 자본주의 선언서라고 비난하는 목소리도 있다. 러시아에서 태어난 아인 랜드는 볼셰비키 혁명으로 집안이 몰락한 뒤 1926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그녀는 죽을 때까지 공산주의를 저주하며 살았다.

연극 연출가 이보 반 호브[사진 LG아트센터]

연극 연출가 이보 반 호브[사진 LG아트센터]

2014년 ‘파운틴헤드’가 프랑스 아비뇽페스티벌에 초청된 바 있다. 그때 축제 측이 “원작 소설이 자본주의와 개인주의에 대한 찬사라는 비판을 듣는다”고 지적하자 이보 반 호브는 다음과 같이 반발했다.
 “아인 랜드의 철학이 정치적 논쟁의 대상이라는 건 잘 알고 있다. 나는 연출가로서 이러한 주제를 다루는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 두렵지 않다. 아인 랜드가 극단적으로 하워드 로크(천재 건축가. 이 작품의 주인공이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이상을 좇는다)를 좋게 묘사하고 피터 키팅(로크와 정반대 인물. 사회와 타협하고 권력에 기생해 모자란 재능을 메운다)를 나쁘게 묘사하려 했다면, 나는 끔찍하더라도 맥베스가 아이들을 죽이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지난달 30일 첫 내한 인터뷰 때도 비슷한 질문이 있었고, 그는 비슷한 답변을 내놨다.
 “예술가로서 로크처럼 살고 싶지만, 로크의 개인주의를 동의하지는 않는다. 나는 이번 작품에서 로크와 키팅을 최대한 동등하게 다뤘다고 생각한다.”
 지극히 상식적으로, 원작 소설과 소설을 무대에 올린 연극은 전혀 다른 장르다. 하여 이보 반 호브의 대답을 믿었다. 연극을 보기 전이었으므로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파운틴헤드’를 끝까지 지켜본 지금, 생각이 달라졌다. 연극 ‘파운틴헤드’는 예상보다 편파적인 작품이었고, 따라서 위험한 작품이었다.

연극 '파운틴헤드'의 서울 공연 장면. 극을 이끄는 두 주인공 로크(오른쪽)와 키팅이다. 두 사람은 경쟁 관계로 보이지만 실은 우열 관계에 놓여 있다. [사진 LG아트센터]

연극 '파운틴헤드'의 서울 공연 장면. 극을 이끄는 두 주인공 로크(오른쪽)와 키팅이다. 두 사람은 경쟁 관계로 보이지만 실은 우열 관계에 놓여 있다. [사진 LG아트센터]

 # 개인주의의 손을 들다

 이보 반 호브는 로크와 상대되는 역할로 키팅을 꼽았다. 그러나 로크의 상대는 키팅이 아니었다. 키팅은 그저 편법을 일삼는 협잡꾼일 뿐이었다. 두 인물은 한 번도 경쟁한 적이 없었다. 로크는 늘 올바르고 훌륭했지만, 키팅은 늘 천박하고 저열했다. 둘의 관계는 경쟁의 관계가 아니라 우열의 관계였다. 자본주의 위계시스템에서 로크는 성공한 존재였고 키팅은 실패한 모델이었다. 두 사람은 비교 대상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명암과 같은 한 존재였다.
 사실 로크의 반대편에 서 있는 인물은 따로 있었다. 건축 비평가 엘스워스 투히였다. 엘스워스 투히의 철학을 읽을 수 있는 대사 한 토막을 옮긴다.
 “나는 두 가지 본질적인 개념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자유와 강제. 오늘날 우리는 자유와 강제가 정반대의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자유와 강제는 하나입니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가능하게 하니까요. 일례로 신호등은 길을 건널 때마다 우리의 자유를 제한하지만, 차에 치이지 않도록 보호해주죠. 새로운 강제성이 가해질 때마다 우리는 새로운 자유를 얻는 겁니다. 사람들은 안정적인 구조 속에서 훨씬 더 행복하게 됩니다.”
 말하자면 투히는 공동체주의를 설파한다. ‘나’보다는 ‘우리’를 앞세우는 생각, ‘우리’가 우선이므로 ‘나’는 일정 정도의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발상이다. 개인보다 공동체를 먼저 고민하는 철학은 역사에서 사회주의의 기초를 제공했다.
 연극에서 투히는 여론을 조작해 대중을 선동한다. 남을 위하는 것처럼 행동했지만, 실은 자신의 이해를 위한 행동이었다. 로크를 곤경에 빠뜨리는 장본인도 투히다. 말하자면 ‘나쁜놈’인 것이다. 아인 랜드는 평생 사회주의를 저주했던 인물이다. 아인 랜드는 엘스어스 투히를 통해 사회주의를 비판했고, 그 비판을 이보 반 호브가 이어받았다.

연극 '파운틴헤드'의 서울 공연 장면. 투히가 자신의 사상을 말하는 장면이다. 공공의 삶을 역설하는 투히는 연극에서 여론을 조작하고 대중을 선동하는 역할로 나온다. [사진 LG아트센터]

연극 '파운틴헤드'의 서울 공연 장면. 투히가 자신의 사상을 말하는 장면이다. 공공의 삶을 역설하는 투히는 연극에서 여론을 조작하고 대중을 선동하는 역할로 나온다. [사진 LG아트센터]

 피날레에서 로크의 가치관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원작에서도 막바지에 로크의 긴 독백이 등장하는데, 이보 반 호브도 맨 마지막에서 주제를 공개했다. 단언하건대 ‘파운틴헤드’의 하이라이트가 되는 대목이다. 원래 대사는 훨씬 길지만 주요 구절만 인용한다. 

 “인간이 생존할 방법은 두 가지뿐입니다. 자신의 정신을 이용해 독자적으로 살거나, 다른 이들의 정신에 기대어 기생하는 것입니다. 창조자는 만들어냅니다. 기생하는 자는 빌립니다. 창조자는 자신의 일을 위해 삽니다. 일차적인 목표가 자신 안에 있습니다. 기생자는 빌어서 살기에 다른 사람이 필요합니다. 빌어 사는 사람이 필요한 것은 다른 사람과의 단단한 연결고리입니다. 그는 타인을 위해 살아야만 하고, 타인을 자신보다 위에 두라고 배웁니다. 이러한 인간상에 가장 가까운 것은 바로 노예입니다. 창조자는 뭔가를 위해 봉사하지 않습니다. 오직 자신을 위해 삽니다.  
 사람들은 최고의 미덕이 성취하는 게 아니라 베푸는 거라고 배웁니다. 하지만 만들어지지 않은 것을 베풀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함께 서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지만, 창조자는 홀로 서 있습니다. 동의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배우지만 창조자는 반대합니다. 사람들은 자아는 악과 동의어이며 이타심이야말로 이상적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자기희생에서 기쁨을 얻어야 한다고 가르치자 인간은 덫에 빠지게 됩니다. 인간은 마조히즘을 이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삶의 본질은 의존과 고통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했던 것입니다. 인간의 첫 의무는 자신이 되는 겁니다. 누구도 타인을 위해 대신 살 수 없습니다. 인간은 독자성과 의존성 사이에서 선택해야 합니다.”
 구구절절 옳은 말씀이다. 그러나 섬뜩한 생각이기도 하다. 로크의 철학은 소위 힘의 논리다. 있는 자, 가진 자, 잘난 자의 언어다. 니체가 전파했던 철학이자, 나치가 선동했던 이데올로기다. 잘났으면 그렇게 살 수도 있다. 하나 못났으면 그렇게 살고 싶어도 못 산다. 로크의 말처럼 노예로 살 수밖에 없다.

연극 '파운틴헤드'의 서울 공연 장면. 강력한 폭발음과 함께 강한 바람이 무대 오른편에서 불어온다. 로크가 자신이 설계한 건물을 폭파하는 장면이다. 무대 앞에 여주인공 도미니크가 누워 있다. 로크의 계략에 이용당한다. [사진 LG아트센터]

연극 '파운틴헤드'의 서울 공연 장면. 강력한 폭발음과 함께 강한 바람이 무대 오른편에서 불어온다. 로크가 자신이 설계한 건물을 폭파하는 장면이다. 무대 앞에 여주인공 도미니크가 누워 있다. 로크의 계략에 이용당한다. [사진 LG아트센터]

 여주인공 도미니크가 수동적인 캐릭터인 것도 이 때문이다. 로크가 도미니크를 성폭행할 때 도미니크는 로크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채석장 인부, 다시 말해 성난 수컷일 뿐이었다. 로크가 천재 건축가였다는 사실을 알고서 도미니크는 자신을 성폭행한 로크와 사랑에 빠진다. 이후 그녀는 남자들의 욕망에 이용당하고, 스스로 제 인생을 망가뜨린다(로크가 도미니크를 이용해 복수하는 장면에서 도미니크는 차라리 신파에 가까운 대사를 읊는다. “당신을 위해서라면”이라니). 소설이 발표됐던 1940년대는 미국에도 여성 참정권이 없던 시절이다. 그때는 그랬다. 그러나 21세기에도 여성이 타자(他者)로만 소비되는 예술은 솔직히 당혹스럽다.
 자본주의의 경쟁은 늘 승자와 패자를 양산한다. 승자가 아니면 패자다. 승자의 논리가 있듯이 패자의 형편도 있다. 로크의 역설처럼 누구도 타인을 위해 대신 살 수는 없다. 그렇다고 타인의 인생을 함부로 기생이라고 할 수는 없다. 아니 그래서는 안된다. 더욱이 예술이다.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승자의 가치를 포장하거나 강요하는 것은 불온한 선동이다. 예술적 취향이라고 말하기에 이보 반 호브는 이미 너무 유명하다.
 미안하지만 말해야겠다. 이보 반 호브, 당신은 진정 빼어난 연출가다. 그러나 당신의 그 잘난 이야기는 좋아하지 못하겠다.
 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