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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째 뽑힌 저 나무처럼, 권력은 공허한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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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개막 전부터 화제에 올랐던 연극 ‘왕위 주장자들’의 공연 장면. 무대 중앙에 커다란 나무 밑동이 매달려 있고 나무 뿌리 아래에서 인간 군상들이 권력을 향한 추악한 욕망을 드러낸다. [사진 세종문화회관]

개막 전부터 화제에 올랐던 연극 ‘왕위 주장자들’의 공연 장면. 무대 중앙에 커다란 나무 밑동이 매달려있고 나무 뿌리 아래에서 인간 군상들이 권력을 향한 추악한 욕망을 드러낸다. [사진 세종문화회관]

무대는 검은 벽에 갇혀 있었다. 8m 높이의 강고한 벽 안에서 인간들이 권력을 좇아 부지런히 경쟁했다. 무대 중앙에는 커다란 나무 밑동이 핏줄 같은 뿌리를 드러낸 채 매달려 있었다. 김광보 연출이 “뿌리는 근원을 상징한다”고 설명했지만, 나무 아래 무대는 벌레 득시글거리는 땅속 세상이 연상됐다. 이 닫힌 공간에서 인간의 욕망은 하찮고 부질없는 것처럼 비쳤다. 그렇게 권력은 헛된 것이었다.

서울시극단 연극 ‘왕위 주장자들’ #왕위 쟁탈 다룬 입센의 1863년작 #어수선한 대선정국에 강한 메시지

개막 전부터 화제에 올랐던 ‘왕위 주장자들(∼23일,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이 지난달 31일 막을 올렸다. 서울시극단 창단 20주년 기념작이자 국내 초연작이라는 의의는 솔직히 공연계 내부의 사정이었다. 관객으로서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이 정치 드라마는 우리의 심란한 오늘을 어떤 식으로든 발언하는 문제작이었다. 연극이 처음 무대에 오른 날 하필이면 전 대통령이 구속됐고 세월호가 뭍으로 돌아왔다.

개막 전부터 화제에 올랐던 연극 ‘왕위 주장자들’의 공연 장면. 무대 중앙에 커다란 나무 밑동이 매달려 있고 나무 뿌리 아래에서 인간 군상들이 권력을 향한 추악한 욕망을 드러낸다. [사진 세종문화회관]

개막 전부터 화제에 올랐던 연극 ‘왕위 주장자들’의 공연 장면. 무대 중앙에 커다란 나무 밑동이 매달려있고 나무 뿌리 아래에서 인간 군상들이 권력을 향한 추악한 욕망을 드러낸다. [사진 세종문화회관]

‘왕위 주장자들’은 노르웨이 극작가 헨리크 입센(1828∼1906)이 1863년 발표한 역사극이다. 내전이 발발했던 13세기 노르웨이의 어지러운 정세를 담고 있다. 호콘 호콘손과 스쿨레 백작이 왕좌를 놓고 전쟁을 벌이고 니콜라스 주교가 둘 사이를 오가며 싸움을 부추긴다. “3년 전 처음 작품을 접했을 때 154년 전 노르웨이와 오늘날 우리의 사정이 흡사해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다고 혼란한 시국을 이용하려는 의도는 없었습니다. 올 봄 무대에 올리기로 결정한 건 작년이었습니다. 이번 봄에 대선을 치를 줄 몰랐을 때였습니다.”

김광보 연출은 우연을 강조했다. 하나 우연치고는 고약하다. 2014년 봄에도 김 연출은 입센의 작품 ‘사회의 기둥들’을 무대에 올렸고, 작품 줄거리와 세월호 사건이 겹쳐 본의 아니게 곤욕을 치렀다. 연극은 하필이면 인간들이 각자의 이익을 위해 고장난 배를 띄웠다가 배가 가라앉는 사건을 그렸다.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왕위 주장자들’의 갈등 구조는 현 시국과 거리가 있다. 설정만 보면 단종과 수양대군의 관계가 떠오른다. 선왕의 아들로 태어나 왕권을 계승한 호콘 호콘손과 오랜 세월 섭정을 한 선왕의 동생 스쿨레 백작의 각축을 다루고 있어서다. 다만 노르웨이의 단종은 확신에 차 있고 노르웨이의 수양대군은 의심이 많다. 스쿨레 백작의 고민에서 햄릿이 연상되기도 했는데 외모는 호콘이 햄릿과 더 가까웠다.

그럼에도 스쿨레 백작의 파란만장한 역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다. 오랜 세월 그는 왕을 꿈꿨고 잠깐이나마 왕권을 쥐기도 했다. 그러나 끝내 그는 왕좌에서 쫓겨나고 죽임을 당한다. 여기에서 의미심장한 대목이 나온다. 스쿨레 백작을 죽인 건 호콘의 군대가 아니었다. 분노한 시민이었다. 권력을 위해 신성모독도 서슴지 않은 스쿨레 백작을 시민은 끝까지 쫓아간다. 오로지 살기 위해 시민은 한때 그들의 왕을 처단한다.

다시 무대로 돌아오자. 검은 벽에 둘러싸인 무대는 늘 비어 있다. 무대를 비우기로 유명한 김광보 연출은 이번에도 배우들만으로 무대를 채웠다. 원작 자체도 대작이었다. 83쪽 분량의 대본을 2시간 공연시간에 맞추기 위해 53쪽으로 줄였다. 하여 대사가 많고 빨랐다. 그만큼 배우들의 연기가 중요했는데, 대사는 대본과 토씨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배우 20여 명이 수없이 무대를 들락거렸지만 동선이 겹치는 경우도 없었다. 공연을 두 달쯤 앞두고 주연배우가 교체되는 곡절을 겪었는데도 작품은 완성도가 돋보였다. 세종문화회관 이승엽 사장은 “서울시극단의 저력”이라고 말했다.

뿌리째 뽑힌 나무를 다시 올려다봤다. 언뜻 왕관처럼 보였다. 뿌리 아래 세상에선 저마다 왕이라며 발버둥쳤지만, 하늘에 매달린 왕관에 손을 댄 왕위 주장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권력은 공허한 것이었다.

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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