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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분이면 되는 투표, 내게는 5시간의 장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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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병변 1급 장애를 갖고 있는 A(46·여·서울 성북구)씨는 '그날'을 잊을 수 없다. 지방선거가 열린 2014년 6월 4일 이야기다. A씨는 만 19세 이상의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두 가질 수 있는 '한표'를 행사하기로 했다.
외출 채비를 마치고, 장애인 콜택시를 불렀다. 기다린 시간은 2시간. 택시 운전기사의 도움을 받아 정오께 투표장에 도착했다. 김씨는 당황했다. 기표소는 계단을 지나가야 갈 수 있는 2층. 그의 전동휠체어로는 도저히 갈 수 없는 곳이었다. 도움을 청했다. 한참을 기다리자 투표 사무원이 나타났다. 1층 로비에 임시 기표소를 마련해주겠다고 했다. 기표소를 세우는 데 걸린 시간은 1시간. 기표소는 휠체어가 들어가기에 좁았다. 손이 불편한 그는 선거관리 담당자에게 기표 도움을 부탁했다. 두 사람이 기표소에 들어서자 하얀 기표소 장막이 벌어졌다. 밖에서도 그가 뭘 하는지 훤히 보일 정도였다. 투표를 마치고 다시 장애인 콜택시를 불렀다. 집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5시. 투표를 하는 데 5시간이 걸린 셈이었다. 그는 "내가 제대로 투표한 것인지, 비밀투표가 보장된 것인지 모르겠다"며 "이번 5월 대통령 선거에서는 장애인들도 불안감 없이 제대로 투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선거법상 도움받지만 불안감 여전 #시설 장애인 32% "직원이 투표 결정" #장애인 투표권 침해 사례도 잇따라 #공보물 면수 제한으로 정보도 차별

시각장애인 B(42·남·서울 송파구)씨는 "2014년 지방선거 때 주민센터 직원이 기표소에 들어와 대신 표를 대신 찍어줘서 불안하고 불쾌했다"고 했다. 평소 도움을 주는 활동보조인과 함께 기표소에 들어가려 했지만, 주민센터 직원이 막아섰다. 공직선거법상 활동보조인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돼 있지만 거부당한 것이다.
 B씨는 "어쩔 수 없이 주민센터 직원에게 누구를 찍겠다고 말했지만, 본인이 원하는 사람을 찍은 뒤 내 말대로 했다고 해도 확인할 길이 없었다"고 했다. 그는 "주민센터를 통해 정부 보조를 받다보니 주민센터에 강력하게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며 "후원같은 것이 들어올 때 저를 제외시킨다고 하면 어떻게 하겠나. 불쾌하다 못해 (내 처지가) 슬펐다"고 했다.

이정훈(사진) 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정책실장은 "이번 5월 대선에서는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장애인들의 참정권이 보장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이정훈(사진) 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정책실장은 "이번 5월 대선에서는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장애인들의 참정권이 보장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허모씨는 최근 시민마이크에 '장애인의 선거권을 보장해달라'는 글과 메시지를 남겼다.

허모씨는 최근 시민마이크에 '장애인의 선거권을 보장해달라'는 글과 메시지를 남겼다.

 오는 5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장애인 선거권을 보장해달라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장애인 유권자의 참정권 보장을 위해 지난해부터 2층 이상의 투표소에는 임시 기표소를 세우고, 기표대 출입규격을 85㎝에서 120㎝로 넓혔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더불어민주당 진선미 의원은 "지난해 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체 투표소 1만3837개 소 중 10.77%인 1490개소가 1층이 아닌 곳에 위치해 있었다"며 "특히 사전 투표소 3511곳 중 17%(598개소)가 1층에 있지 않음에도 승강기를 갖추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고 지적했다. 진 의원측은 "지속적인 개선 요구에도 불구하고 지체장애인과 거동이 불편한 유권자들의 투표권이 심각하게 침해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장애인 단체들은 투표 보조 도움을 받을 때에 120㎝로 넓힌 신형 기표소라 해도 너무 좁아 비밀투표권을 침해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현행 공직선거법(제157조)에 따르면 신체 장애로 기표할 수 없는 선거인은 가족 중 1명이나 지명한 2인을 동반해 기표소에서 투표 보조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돼 있다. 김성연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사무국장은 "장애인의 활동보조인이 투표 보조로 참여할 수 있고, 이 동행인이 보조로 참여할 때는 선관위에서 나온 한 사람이 동석해 당사자 의사대로 투표가 되는지를 확인하도록 하고 있지만 현장까지 전달이 잘 안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장애인 투표권

장애인 투표권

장애인차별철폐연대 등 장애인 단체들은 특히 법 개정을 통해 장애인 거소투표 문제를 보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행 공직선거법(제38조)은 요양시설 등에 거주하는 장애인들이 부재자 투표의 일환으로 시설 내에서 투표할 수 있도록 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 제도로 인해 장애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거소투표 신청이 이뤄지고, 선거권이 대리행사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이들 단체의 주장이다. 실제로 지난해 4월 국회의원 선거에서 강릉의 한 복지시설 직원들이 시설 장애인 36명의 의사를 묻지 않고 이들의 도장을 이용해 거소투표 신청을 한 것이 드러나 기소됐다. 춘천지방법원은 지난해 11월 "온전한 의사표현이 어려운 입소자들 명의로 거짓 거소투표신고서를 작성해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와 민주적 절차에 의해 치러져야 할 선거의 공정성을 해쳤다"며 시설 직원들에게 각각 벌금 70만원을 선고했다. 경남 양산에서도 한 시설에서 지난해 62명에 달하는 거소투표 부정신고가 적발됐다. 선관위에 따르면 지난해 거소투표신고인 수는 약 5만명. 선관위는 "의사표현이 원활하지 못한 노인이나 장애인 유권자를 대상으로 본인 의사에 반해 거소투표신고를 하거나 대리 투표하는 사례가 발생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가인권위원회 조사(2014년·시설장애인 197명 대상)에 따르면 "투표방법을 내가 결정했다"고 답한 경우는 56%로 절반에 불과했다. 반면 "시설직원이 결정했다"는 응답은 32%나 됐다. 인권위는 시설 거주 장애인의 투표방법 결정의 자기 결정권 보장이 필요하며, 이를 위한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김성연 사무국장은 "공직선거법상 거소투표인이 10인 이상이 될 경우에만 기표소 설치를 의무화한 데다 각 정당조차도 거소투표 장소에 참관인을 보내지 않는 등 관심이 전무해 사실상 견제책이 없다"고 지적했다. 김 국장은 "시설에서 장애인 유권자들에게 특정 번호만 안내하는 등의 선거부정은 선관위가 이동투표소 운영과 같은 편의를 제공하는 것만으로 없앨 수 있다"며 "장애인들이 직접 지역사회에서 투표를 할 수 있도록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재왕 변호사는 장애인에게 제한적인 선거정보 제공 문제를 지적했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인쇄물은 일반 인쇄물보다 3배 가량의 분량이 필요하지만 공직선거법이 점자공보물을 일반공보물과 똑같은 면수 제한(대통령 선거 16면, 국회의원 12면)을 두도록 해 선거정보에 있어서도 차별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 이 문제에 대해 헌법소원을 제기한 그는 "법이 바뀌지 않으면 장애인의 참정권 보장은 이뤄지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시민마이크 특별취재팀 peoplemic@peoplemic.com

◇특별취재팀=이동현 팀장·김현예·이유정 기자· 조민아 멀티미디어 제작·정유정(고려대 미디어학부 3학년)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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