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스타일리스트 서정은의 ‘갓포아키’
사실 좀 창피한 이야기지만 식탐이 좀 심한 편이다. 아주 긴장되고 집중력을 요하는 촬영을 하면서도 머릿속으로는 ‘끝나면 뭐 먹으러갈까?’ ‘모레 약속엔 어딜 가면 만족스러울까?’ 하는 생각으로 머리가 시끄럽다. 그런데 식탐만큼 소화력이 받쳐주질 못해 과식하면 체하기 일쑤. 또 패션 스타일리스트로서 살이 찌면 스타일이 망가질 수 있다는 걱정도 해야 한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말하면 나는 ‘갓포 요리’를 사랑한다. 고급 스시야에서 먹을 수 있는 퀄리티 높은 섬세한 일식이지만, 정식 코스만큼 무겁지 않아 술과 함께 만족감을 느낄 수 있는 곳이 바로 갓포 요리집이다. 한자로는 ‘割(자른다)烹(끓인다)’라고 쓴다. 말하자면 갓포란, 칼로 만드는 모든 음식이자 끓이고 데치고 튀기고 찌고 익히는 기술이 고도로 숙련된 요리사가 만드는 음식을 일컫는다. 고급 료칸에서나 먹을 수 있는 가이세키 요리나 제철 스시를 코스로 먹는 스시야의 음식이 코스의 조화를 중시하는 일련의 순서 있는 식사라고 한다면, 갓포 요리는 그에 준하는 좋은 재료를 조화롭게 조리하는 섬세한 음식이지만 주방장이 마주보이는 바에 앉아 맥락 없이 일관성 없이 시켜먹는 단품 음식 위주의 요리를 말한다.
아! 정신적 육체적으로 고단한 촬영을 마치고 편한 사람과 맛있는 음식에 반주 한 잔 걸치는 시간은 숙면 또는 보약 이상으로 소중한 시간이니 내게 꼭 맞는 식당의 형태가 아닐 수 없다.
‘갓포아키’를 처음 찾은 건 5년 전 늦은 밤이었다. 이미 근처 식당에서 푸짐하게 저녁을 먹은 후라 배가 불렀지만 오랜만에 만난 일행과 헤어지기 아쉬워 ‘딱 한 잔만 더 하자’고 찾은 곳이다. 그때 주문한 메뉴는 ‘타이노 오차즈케’. 적당한 온도의 향 좋은 오차에 담백한 도미와 밥을 말아 먹으니 빵빵하게 불렀던 속도 편하고 술안주로 깨작거리기에 안성맞춤의 메뉴였다.
그날그날 13가지 엄선한 회 모둠
사람 수대로 한 점씩 추가 주문 가능
속 편해지는 도미 오차즈케도 일품
장의 고소함과 엔초비의 감칠맛 덕분에 사랑받는 ‘밥안주(술안주로 먹는 밥)’다. 다른 데서 먹어보기 힘든 안키모(아귀 간) 우니는 이곳만의 시그니처 메뉴다. 수비드(저온 조리법)를 이용해 크림치즈처럼 향이 풍부하고 식감도 부드럽다. 그 밖에도 비릿한 생선회를 먹고 입안을 가셔줄 츠케모노(채소를 절임한 일본 저장 음식) 역시 구성이 고급스럽다. 나마비루(생맥주)와 잘 어울리는 튀김도 매번 수준급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도산공원 주변은 일본요리 주점의 각축장이었어요. 차별화를 위해 고심하다 ‘갓포’라는 단어를 붙이게 됐죠. 일본 요리에선 ‘비튼다’고 하는데, 여러 가지 기본 식재료를 조금씩 비틀어 레시피를 새롭게 연구한 게 우리만의 자랑입니다.”
파크하얏트호텔을 비롯해 유명 호텔과 스시야 등에서 경험을 쌓은 배 셰프는 진짜 머리가 좋은사람 같다. 기발하게 비틀었지만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리는 기본기가 탄탄한 데다 ‘이 집은 이게 아쉬워’ 할 것 없이 두루두루 맛있으니 말이다. 한여름에 더워서 메밀국수가 먹고 싶어도, 시원한 맥주에 튀김을 먹고 싶어도, 사케 한 잔에 회가 땡겨도, 손끝 시린 추운 날 뜨끈한 우동이 생각나도 갓포 아키(도산점)을 찾게 되는 이유다.
글 서정은.
패션잡지 에디터를 거쳐 현재는 프리랜서 패션 스타일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스타일링을 맡고 있는 방송인 신동엽과 시시때때로 미식과 맛집 정보를 나누며 행복해 한다. 50대에는 풍류를 아는 음식 평론가가 되는 게 꿈이다.
갓포아키
·주소: 강남구 신사동 651-5(도산대로45길 8-3 쿠키빌딩)
·전화번호: 02-540-8669
·영업시간: 평일 오후 6시~자정, 금·토요일 오후 6시~새벽1시. 일요일 휴무
·주차: 가능
·메뉴: 사시미 모리아와세 13종을 어종별로 4조각씩 9만 9000원, 3조각 7만9000원, 2조각 5만9000원. 이와세낫토 2만5000원, 아나고튀김 2만3000원, 스시 12종 3만5000원, 안키모 1만5000원
·드링크: 사케 2만원대부터. 와인 5만원대부터. 생맥주 9000원~1만3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