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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와의 분투 멈춘 한국 인문학의 대부 박이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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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26일 타계한 박이문 교수는 늘 따뜻하고 인자했다. 4년전 고인의 연구실에서 가진 인터뷰 모습. [중앙포토] 

26일 타계한 박이문 교수는 늘 따뜻하고 인자했다. 4년전 고인의 연구실에서 가진 인터뷰 모습. [중앙포토]

노환으로 87년 철학자 삶 마감 #문학 환경 예술 등 전방위 걸쳐 #100여권 저술 써낸 '진짜' 학자 #진중권 "유일한 미학자"라며 경외

철학·문학·예술 등 전방위에 걸쳐 왕성한 지적 활동을 보이며 세계적 명성을 쌓아온 '한국 인문학의 대부' 박이문(본명 박인희) 포항공대 명예교수가 26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87세. "세계관으로서의 철학이라는 건축활동, 그 동기와 건축구조는 새의 둥지 짓기와 같다"는 말 때문에 '둥지의 철학자'로 불렸던 이다.

고인은 1930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났다. 서울대에서 불문학으로 학·석사를 받아 곧바로 이화여대 전임강사로 발탁됐지만, 안정적인 교수직을 버리고 프랑스 유학행을 택해 파리 소르본대에서 첫 한국인 문학박사로 이름을 올렸다. 이후 미국으로 또 건너가 철학 박사(서던 캘리포니아대)학위를 받을 만큼 '앎'을 향한 분투는 고인의 삶을 관통하는 절대적 가치였다. 

한편으로 고인은 창작자였다. 1955년 사상계에 시 '회화를 잃은 세대'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모더니즘 계열의 시를 썼고, 2003년부터는 에세이를 꾸준히 펴냈다. 키에르케고르와 사르트르의 영향을 받아 실존주의·분석철학 등 난해한 현대철학에 정통했지만, 고인의 저서가 일반인에게도 널리 전파될 수 있었던 데엔 특유의 풍부한 문학성 이 있었다. "내 책엔 주어를 생략하지 않고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란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제 3자가 아닌, 내 생각을 전달해야 피부에 와 닿고 독자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겠는가. 철학은 결코 어려운 게 아니다"는 게 고인의 생각이었다.

책에 둘러싸인 박이문 포항공대 명예교수. [중앙포토]

책에 둘러싸인 박이문 포항공대 명예교수. [중앙포토]

고인은 여태 100여권의 저작을 남겼다. "서른 넘어선 한해 최소 한권은 썼다"고 했다. 철학뿐 아니라 언어학·과학·종교·문명 등 외연을 계속 넓혀갔다. 특히 예술 분야에 대한 식견이 탁월해 일찍이 진중권 동양대 교수는 "박이문 선생님이야말로 한국에서 유일하게 자기 이론을 가진 미학자"라며 경외심을 보이기도 했다. 주요 저서로는 『노장사상』『철학의 흔적들』『나비의 꿈이 세계를 만든다』『철학적 경영이 미래를 연다 』등이 있다.
학문적 깊이와 달리 일상은 소탈했다. 무더운 여름이면 선풍기에 속옷 차림으로 연구실에서 있는 모습이 여러 차례 목격됐다. 강학순 안양대 교수는 "20여년전 에피소드다. 조카 결혼 소식이 전해지자 '대략 비용이 100만원 정도는 드나'라고 해 주변이 웃음바다가 됐다. 공부 말고는 세상물정 전혀 모르는 천진난만한 양반"이라고 기억했다. 결혼은 55세에 했다.

한국 인문학의 대부 박이문 교수. [사진 미다스북스]

한국 인문학의 대부 박이문 교수. [사진 미다스북스]

80대 들어서도 지적 호기심을 약해지지 않았다. 『더불어 사는 인간과 자연』등을 펴내는 등 환경 분야로 관심을 옮겨 생태중심주의를 주창했다. 이는 손자뻘되는 20대 어린 제자들과도 스스럼없이 토론을 즐기는 고인의 '수평적 일상'이 학문에도 그대로 투영됐다는 전언이다. 그러면서도 어떠한 것에도 절대적인 답은 없다는 허무주의자였다. "절대적인 게 없기에 지금 이 순간 몰입해 최선을 다하면 되는 거 아닌가"라고 했다. 궁극적으론 "가장 위대한 철학은 '착함'"이라며 일상의 삶과 앎을 동일선상에 놓은 윤리행동가였다. 유족으로는 부인 유영숙 여사와 아들 장욱 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발인은 29일, 장지는 국립 이천호국원. 02-2227-7500.

최민우 기자 minw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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