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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혁명 70주년 꿈과 현실-2|「스탈린」비판통해 정통성 확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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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새로운 시대의 문을 열려는 정치지도자는 지나간 시대의 재평가를 거의 예외없이 시도해왔다. 역사의 진행방향을 자신의 정치노선에 일치시키려는 일종의 「정통성」마련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주의국가라고 예외는 아니다. 「고르바초프」소련공산당서기장이 2일 볼셰비키혁명 70돌을 맞는 자리에서 행한 연설의 주된내용이 「스탈린」시대의 비판과 그동안 부정돼 왔던 역사인물의 복권으로 채워져 있는 것도 「고르바초프」의 개혁선언이 야심만만함을 보여준다.
85년3월 「체르넨코」의 사망으로 서기장의 자리에 오른 「고르바초프」는 이점에서 70년만에 「제2의 혁명」을 시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의 연설내용을 살펴보면 그가 의도하고있는「페레스트로이카」(개혁)가 무엇을 목표로 하고있는지 또 어떤 장애에 부닥쳐있는지 잘 드러난다.
그는 현재 소련이 부닥치고있는 모든 문제가 「스탈린」시대에서 비롯한다고 보고 「스탈린」의 비판과 「스탈린」에게서 박해받은 인사들의 노선이 바로 그의 개혁정책의 출발점이 되고 있음을 재확인하고 있다.
「고르바초프」자신 이를『역사에 공백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표현, 볼셰비키혁명초기의 순수한 열정과 접목시키려하고 있는 셈이다.
그는 「스탈린」의 가장 큰 죄과로 「권력남용」과 「개인숭배」를 들면서 한편으로「공업화」와 「집단화」를 통해 세계 제2의 강국으로 끌어올린 「스탈린」의 공적도 언급, 일종의 타협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러나 「스탈린」비판노선은 분명하게 제시되고 있으며 「흐루시초프」「브레즈네프」 도 「스탈린」의 잘못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고 지적, 『「스탈린」으로부터의 탈피는 무엇보다 민주화와 경제적 개혁에서 찾아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고르바초프」는 「스탈린」의 정적으로 숙청당한 혁명동지들 가운데 지난 56년 「흐루시초프」도 손대지 못한 「부하린」(전 프라우다편집장), 「카메네프」(전 모스크바시책임자),「지노비에프」(제3인터내셔널의장)등 3명을 복권대상으로 지목하고 있다.
이중에서도 특히 「부하린」은 「고르바초프」가 시도하고있는 경제적 개혁의 원형이라 할만한 「네프」(NEP·신경제정책)의 입안자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부하린」등 3명은 「레닌」의 사후 「스탈린」과 함께 후계자싸움을 벌였던 「트로츠키」의 추종자. 때문에 「스탈린」의 대숙청과 함께 당에서 제명되었고 「카메네프」와 「지노비에프」는 36년에,「부하린」은 38년에 각기「반소스파이」의 혐의를 뒤집어씌워 처형당한 비극의 인물들이다.
「고르바초프」의 연설문에 보면 복권되어야할 이유로 『「부하린」은 공산당내에서도 가장 중요한 이론가이며 그의 이론은 「시간적 유보」라는 단서를 붙여야 하지만 진실한 마르크스주의 동지임에 틀림없다』는「레닌」의 칭찬을 빌어 재평가를 시도하고 있다.
사실 「부하린」이 입안한「네프」는 현재 「고르바초프」가 추진중인 경제개혁과 여러점에서 흡사하다.
소련내외의 정세는 20년대 「네프」당시와는 많은 차이가 있지만 「고르바초프」정권도 70년대에서 80년대 중반에 걸쳐 심각한 경제적 정체를 경험했기 때문에 이를 회생시킬 대책이 절실히 필요했다. 여기서 급진개혁파의 경제학자들이『네프로 돌아가자』고 외치기 시작, 「고르바초프」도 이를 자신의 개혁정책속에 과감히 흡수한 것이다.
「네프」가 특히 「고르바초프」의 정책속에 수용될 수 있었던데는 그의 정권이 전전의 「스탈린」시대로부터 넘겨받은 중앙집권적이고 경직된 통제경제체제를 완화, 기업의 자주성확대, 독립재산제, 자금자체조달제등을 실시할 필요성이 배경이 되고있다.
소련에서는 금년 5월부터 일부의 소비재생산과 서비스부문에서의 사영이 인정되고 있어 「네프」때의 사적경영과는 차이점이 있지만 경제개혁이 진전됨에 따라 공업·농업에서의 청부제, 집단농장에서의 상품매매 등 「네프」적 요소가 넓어질거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고르바초프」의 이 같은 역사비판·인물재평가를 두고 과연 어디까지 진전될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회의적으로 보는 서방전문가들이 많다. 당장 당내보수세력의 저항이 만만치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번 연설의 초안이라고 할만한 그의 저서『페레스트로이카-우리나라 및 전세계에 대한 새로운 사고』에서도 『「스탈린」에 대한 종래의 날카로운 비판에서 많이 후퇴, 「스탈린」의 신속한 공업화와 농업집단화 조치가 없었다면 소련은 20세기에 존속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긍정하고 있는 것이다.
「크렘린의 심각한 내분」이라고까지 얘기되는 당내 넘버투맨 「리가초프」와의 알력도 이 같은 「스탈린」에 대한 입장의 차이에서 비롯한다는 얘기도 있고보면 보수파의 눈치를 살펴야하는「고르바초프」의 고충도 짐작할만하다.
그러나 그는 연설서두에「스탈린」의 하수인에 의해 암살된 「트로츠키」의 진실성에 대해서도 프티 부르좌적 성향, 당파적 자세가 당내다수파의 비판을 받았다는 지적과 함께 언급, 「부하린」등과 함께 역사의 책갈피속에서 다시 끄집어 내려하고 있다. 이는 한때 「러.시아 제1의 공적」이라고까지 지목되어 온 「트로츠키」의 복권이 다음 과제임을 암시한다.
「고르바초프」를 떠받치고있는 개혁노선의 두 기둥 가운데 한 개가 「부하린」의 경제개혁안에 뿌리를 두고있다면 정치의 분권화·민주화가 「트로츠키」가 그린 개혁(제2의 보조혁명)이론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처럼 「고르바초프」의 꿈은 원대하다. 「스탈린」의 비판에서 출발, 자기류의 사회주의건설로 「1917년의 신화」를 되살려 보려는 것이다.
그러나 중공의 「사회주의초급단계론」과 마찬가지로 그의 개혁노선은 「좌」(보수파)와 「우」(개혁파) 모두의 눈치를 살펴야하는 만큼 어정쩡한 단계에 있는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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