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 ‘이세돌답지’ 않은 한 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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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1면

<4강전 1국> ●커  제 9단 ○이세돌 9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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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보(27~36)=‘천적’ 관계는 바둑에서 특히나 치명적이다. 바둑에서 중요한 마음가짐 중 하나가 ‘반전무인(盤前無人)’이다. 앞에 사람이 없는 듯 바둑을 두라는 말이다. 하지만 바둑을 두다 보면 이게 얼마나 지키기 어려운지 절감하게 된다. 반상을 기웃거리는 상대의 검은 그림자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더구나 천적 관계라면 온몸을 짓누르는 상대의 존재감에서 쉽사리 헤어나올 수 없다.

이세돌 9단도 커제 9단의 그림자가 유난히 무거웠던 걸까. 실전에서 백28로 젖히고 흑29로 따라 젖히자 의외의 수가 나왔다. 이 9단이 손을 돌려 30으로 슬그머니 2선에 돌을 놓은 것. 대국을 지켜보던 국가대표 상비군 선수들이 순간적으로 고개를 갸웃거린다. “뭔가 이상한데….” ‘참고도’ 흑1로 단수를 얻어맞고, 흑의 모양까지 쉽게 정리되어서는 백한테 좋을 게 없다는 게 중론이다. 송태곤 9단도 “찬성할 수 없다. 모양상으로도 이상하고 평소 이세돌의 스타일과도 맞지 않다”고 못박았다.

참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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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제 9단이 31로 쌍립을 서면서 뒤늦게 32로 늘었지만 잔뜩 움츠러든 백 모양이 불안정하다. 뒷맛도 고약해 흑A로 이을 경우 백의 사활이 분명치 않다. 반면, 흑은 33, 35까지 자세가 편안하다. 상대의 돌을 손쉽게 정리해주다니, 분명 이세돌답지 않다. 구겨진 국면을 전환하려는 걸까, 돌연 이 9단의 손길이 우변으로 향한다.

정아람 기자 a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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