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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기 대통령 누가 돼도 또 탄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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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채인택
채인택 기자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채인택논설위원

채인택논설위원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은 권좌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고대 그리스의 일화인 ‘다모클레스의 칼’이 떠오른다. 다모클레스는 기원전 4세기 그리스 식민지였던 시칠리아 시라쿠사에 살던 인물로 당시 지배자 디오니시우스 2세의 권력을 부러워했다. 그러자 디오니시우스 2세는 다모클레스를 초청해 자신의 자리에 앉아보게 했다. 자리 위에는 한 줄기 말총에 위태롭게 매달린 날카로운 칼을 걸어놓았다. 권좌가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칼날 아래에 앉는 것처럼 위태롭다는 것을 가르쳐줄 의도였다.

현행 헌법상 과도한 권한은 실수와 화를 부르는 불씨 #국가원수·정부수반·정치지도자 분리하는 개헌해야

이런 자리에 앉기 위해 수많은 정치인이 5월 9일의 대선에 출사표를 던지고 있다. 한국 대통령제의 근본적인 문제로 국가원수와 정부수반, 집권당의 실질적인 주인을 겸한다는 점을 지적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권한만큼 부담도 크고 실수하기도 쉽다. 거의 모든 대통령 본인이나 가족이 하야·암살·탄핵·사법처리의 화를 겪은 원인을 이러한 ‘제왕적 대통령제’에서 찾는 사람도 상당수다.

그래서 이번 대선일에 개헌을 묻는 국민투표도 함께 실시해 대통령 권한을 분산하자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개헌을 한다면 국가원수와 정부수반, 그리고 집권당 대표의 역할을 아예 각각 분리하는 방안은 어떨까? 지난 19일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61) 전 외교장관이 제12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독일이 그렇게 하고 있다.

독일의 정치 제도를 관찰하면 흥미롭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내각 책임제를 채택한 독일에선 총리가 행정부 수반이자 집권당 대표로서 국정과 정치를 맡고 나라를 대표하는 국가원수 역할은 대통령이 한다. 국가원수와 행정부 수반을 분리한 것이 핵심이다. 대통령은 외국과의 조약이나 연방법에 거부권이 있지만 위헌이라고 판단했을 때만 이를 행사할 수 있을 정도로 권한이 약하다. 하지만 대통령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경우가 세 가지 있다. 첫째, 전쟁의 경우 의회가 결정해도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해 중단시킬 수 있다. 합법적이고 민주적인 투표로 뽑은 권력이 악마로 변한 나치 시대를 경험한 데서 나온 지혜이기도 하다.

둘째, 정치적 불안정에 대비한 예비권력의 성격이다. 총리가 선출되지 않은 상태에서 연방의회가 해산되는 ‘입법비상사태’가 발생하면 대통령은 임시로 입법권을 행사할 수 있다. 전후 독일에선 이 같은 경우가 세 차례나 있었다. 셋째, 독일 대통령은 국민통합의 구심점 역할을 한다. 이번에 당선한 슈타인마이어는 사회민주당원으로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의 비서실장을 지낸 좌파 인물이지만 우파인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좌우 연립정권에 참여해 외교장관과 부총리를 맡았다. 좌파는 물론 우파와도 함께 일해 본 슈타인마이어는 좌우 협력을 위해 노력할 것으로 기대된다. 전임자인 요아힘 가우크는 최초의 동독 출신이자 무소속 대통령이다. 옛동독의 인권목사 출신인 가우크는 동서 화합을 위해 힘쓴 대통령으로 기억된다. 독일 대통령은 좌우나 동서가 심하게 분열되면 원칙과 방향을 제시하며 중재를 맡는 ‘큰 어른’ 역할을 한다.

다시 한국 대통령제의 문제점을 되짚어보자. 첫째, 무소불위의 권력을 제한할 방법이 탄핵 말고는 거의 없다. 둘째, 탄핵으로 정치적 공백이나 불안정한 상황이 발생하면 이를 메울 제도적 장치도 없다. 셋째, 대통령이 국민통합의 구심점이 아니라 특정 정치세력만 대표해 왔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이런 취약점은 이번 탄핵 과정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났다. 문제는 대다수 잠룡들이 이런 근본적인 문제를 고치는 개헌보다 대통령에 당선해 권력을 얻는 일에만 치중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행 헌법을 계속 유지하면서 대통령에 당선해 5년 임기를 누린다면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없다. 당선된 본인은 막강한 권한을 누릴 수 있다고 좋아할지 모르겠지만 국민은 여전히 불안하기만 하다. 개헌 없이 취임한 차기 대통령은 제도적 측면에서는 ‘박근혜 시즌2’나 다름 없기 때문이다. 하나의 독선과 권위주의가 사라지고 또 다른 독선과 권위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 우려하는 사람을 적지 않게 만난다. 누가 대통령이 돼도 탄핵 주장이 다시 제기될 수 있다는 악몽 같은 시나리오도 종종 들린다. 본인은 물론 국가적인 불행이다.

채인택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