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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국론분열의 정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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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기현서울대 교수·철학과

김기현서울대 교수·철학과

유난히 춥게 느껴진 겨울을 지나 광장에도 여지없이 봄이 왔지만, 아직도 촛불과 태극기로 대변되던 국론분열은 마무리되지 않아 마음에 온기가 전해지지 않는다. TV와 신문의 많은 분량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조화로운 미래로 갈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해법을 놓고 대선후보들은 또다시 의견이 갈린다. 우리의 마음에 그림자를 던지는 국론분열의 정체는 무엇인가?

보수와 진보는 사회에 안정성과 유연성 주는 두 축 #편가르는 정치적 목적으로 사용되는 악순환 끊어야

우선 박근혜 전 대통령이 법률을 위반했는가, 위반했다면 얼마나 했는가를 둘러싸고 서로 다른 의견이 보인다. 언론 보도, 국회청문회, 특검, 헌법재판소의 조사 과정을 거치면서 많은 이들은 박 전 대통령이 일정 정도 불법을 행했다는 것에 공감한다. 물론 시청 앞에서 흔들던 태극기를 삼성동까지 가져간 사람들 중에는 박 전 대통령이 아무런 흠결이 없으며 어떤 불법도 행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지만, 국론분열의 한 축을 이룬다고 하기엔 이들의 수가 미미하다. 법률 위반을 인정하면서도 그 정도가 대통령직에서 파면할 정도로 위중하지는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까지 포함하면 그 수가 국민의 10%에 달한다. 이 정도 되면 국론분열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정치성이 혼재된 쟁점에 대해 이 정도의 이견은 예측 가능하기도 하고, 시간이 흐르며 서서히 사그라드는 것을 보면 걱정스러운 수준은 아니다.

걱정스러운 국론분열은 박 전 대통령의 행위에 대한 법적 해석을 둘러싸고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법의 영역 너머에 있는 보수와 진보의 대립 상황이다. 독일의 법학자 게오르크 옐리네크는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라고 했다. 한 사회가 존립하기 위해 필요한 윤리적 규범들 중에서 최소한의 공통분모가 법으로 표현된다는 말이다. 뒤집어 보면 어떤 삶을 추구할 것인가,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가, 높은 수준의 정의로운 사회는 어떤 모습을 가져야 하는가 등은 사람들의 선택에 남겨두어야 한다는 말이다.

글로벌한 세상에서 다양한 생각, 생활양식, 가치관이 우리 사회에 퍼지는 것은 피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속도로 변화하는 세상에 적응해 나가기 위해선 오히려 필요하기도 하다. 보수와 진보라는 두 가치관도 마찬가지다. 보수가 기성의 가치관을 옹호하는 입장이라면 진보는 변화를 촉구한다. 보수는 사회의 닻으로 안정성을 준다면, 진보는 사회의 정체성에 경종을 울리며 긴장을 준다. 보수와 진보의 상반된 생각이 공존하는 것은 그 사회가 건강하다는 징표다.

보수와 진보는 사회에 안정성과 유연성을 주는 두 축이지만 잘못 다루면 독이 된다. 두 가치관은 역사, 교육, 복지정책 등 사회의 전반적인 측면에 두루두루 상반된 견해를 낳는다. 다양한 가치가 혼재하는 사회를 효율적 정책을 통해 조화롭게 운용할 책임을 가진 정부가 보수와 진보의 대립을 특별히 조심스럽게 다뤄야 할 이유다.

걱정스러운 국론분열은 지난 정권이 바로 이 지점에서 실패하며 시작됐다. 우리는 지난 정권 초기부터 소통과 포용력의 부족함이 지적된 것을 기억하고 있다.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하기 위해 보수와 진보의 편을 가르고, 자신과 의견을 달리하는 집단을 애국적이지 않은 세력으로 규정하며 상대방을 설득, 대화, 타협의 대상으로 생각하기보다 극복의 대상으로 간주했다. 이런 과정 속에 보수와 진보의 대립은 비전의 차이가 아니라 선과 악의 대립,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투쟁이라는 소모적 틀로 둔갑되었다.

우리 사회는 법을 지키고 따르는 최소한의 얕은 민주주의에서 상호존중의 틀을 기반으로 보수와 진보의 이념을 조화롭게 아우르는 깊은 민주주의로 나아가야 한다. 돌이켜 보면 보수와 진보의 편을 가르고 상대방을 악으로 규정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넓히기 위해 사용한 역사는 꽤나 오래다. 우리 사회가 깊은 민주사회로 발전해 나가기 위해 이제 편협한 편가르기의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 적폐는 청산되어야 한다. 그러나 혹시라도 적폐 청산의 구호가 보수를 악으로 규정해 진보를 결집시키기 위한 정치적 수단으로 사용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김기현 서울대 교수·철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