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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팍팍한 삶 겪고도 아랫배 처지다니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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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시는 곧 밥이다'라고 노래할 수 있는 시인 몇몇을 안다. '시 한편에 삼만원이면/너무 박하다 싶다가도/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라고 노래했던 강화도 시인 함민복, 지게 지고 날품 팔며 서울 남산도서관에서 홀로 공부한 지게꾼 시인 김신용이 그러하다.

한 명 더 있다. 유용주(46.사진). 열네 살에 가출한 뒤로 별별 일 다 겪은 이른바 '목수 시인'이다. 그가 10년 만에 시집 '은근 살짝'(시와시학사)을 냈다. 시집 첫머리는 "꼭 십 년 만에 친정으로 돌아왔다"라고 시작한다.

친정에 돌아와 털어놓은 시인의 십 년은 반성과 자조의 세월이다. 시인은 우선 혹독했던 가난을 회고한다. '너무 맑게 개어 쇳가루 냄새 날 것 같은 하늘 아래/흙이라도 파먹고 싶을 때가 많았다/바위라도 깨먹고 싶을 때가 많았다'('개 같은 내 인생' 부분)라고 돌아볼 때 시편의 정조는 뚜렷했다. 그건, 힘들고 버거운 삶, 어떻게든 지고 나가려는 독한 의지였다. '밥 앞에 고개 숙이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비굴하게 밥을 번 적은 없다'('배 나온 남자' 부분)라고 떳떳하게 말했던 것도 삶을 향한 다부진 각오 덕분이었다.

흘러간 세월만큼 시인도 변했다. 그 사이 펴낸 산문집 두 권('그러나 나는 살아가리라','쏘주 한 잔 합시다')은 베스트셀러가 됐고 같은 임대지만 아파트 평수도 넓혔다. 하여 '젊었을 때 배 나온 사람과 침 흘리며 자는 사람을 유달리 혐오했던' 시인은 어느 날 아랫배 처진 자신을 발견한다. '그렇게 많은 땀을 흘리고도/살이 찔 수 있다니/…/그렇게 많은 상처를 간직하고서도/살이 오르다니'('돼지는 굶어도 돼지다' 부분) 자책하고 자책했지만 어느새 시인은 '늙은 개 한 마리'를 닮아있었다.

'가소롭구나,/현미밥이 어떻고 버섯과 청국장이 저쩌구 채소 위주의 식단에다 생감자는 갈고 마늘은 굽고 양파 즙까지 알뜰하게 챙겨먹는, 혼자만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치는, 복부 비만의 저, 늙은 개 한 마리'-'중견(中犬)' 부분.

중년이 된 시인의 고백이 삶의 위안으로 다가오는 건 시인의 삶, 유독 팍팍했기 때문이며 시인의 목소리, 워낙 진솔하기 때문이다. 그는 아직도 '밥이 차다/발이 차다'('겨울밤' 부분)라고 노래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시인이다.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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