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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브르 박물관은 왜 패션쇼장이 됐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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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서 열린 루이비통 2017 FW 컬렉션

7일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서 열린 루이비통 2017 FW 컬렉션

이번 쇼는 어디서 했어? 요즘 패션계에서 가장 민감하고 흥미진진한 질문이다. 백화점 복도(베트멍)와 재래시장(마틴 로즈), 심지어 화장실(마들렌느)까지 패션쇼의 무대가 되다보니 더 이상 새로울 게 있을까 싶다. 스타 브랜드와 디자이너의 등장은 멈추고, 이제는 누가 더 기발하고 신기한 장소를 찾아내느냐를 두고 경쟁 레이스를 벌이는 듯하다. 그 중에서도 최고급 패션쇼장을 꼽으라면 단연 도시의 랜드마크다. 박물관·미술관·기차역·도서관 등 그 도시를 대표하고, 방문자라면 꼭 한 번 가봐야 할 곳들이 런웨이로 탈바꿈하고 있다. 누구나 갈 수 있는 공공장소에서 아무나 볼 수 없는 패션쇼가 벌어지는 극적인 대조다. 대체 도시는, 패션은 어떤 사연을 품고 있을까. 글=이도은·유지연 기자 dangdol@joongang.co.kr 사진=각 브랜드

루이비통 모델들 예술작품 사이로 캣워크 # 샤넬·디올·로에베 등도 도시 명소에서 패션쇼 # 헤리티지 공유하며 공간의 역사성 공유

파리 그랑팔레에서 열린 샤넬 2017 FW 컬렉션에서는 로켓 모형이 설치됐다.

파리 그랑팔레에서 열린 샤넬 2017 FW 컬렉션에서는 로켓 모형이 설치됐다.

샤넬은 그랑 팔레, 디올은 로댕 갤러리가 주 무대

7일(현지시간) 막을 내린 2017 가을·겨울 파리 패션위크(기성복) 하이라이트는 단연 루브르 박물관에서 열린 루이비통 컬렉션이었다. 비현실적으로 높은 천장의 웅장한 건물, 세월의 더께가 내려앉은 신고전주의 예술품들 사이로 조각상 같은 모델들이 걸어 나오는 장면은 그 자체가 장관이었다. 기실 이 쇼는 장소가 발표되는 순간부터 화제를 모았다. 루브르 박물관이 어디인가. 세계 3대 박물관이자 파리를 대표하는 관광 명소 아닌가. 더구나 박물관 내부에서도 런웨이가 마련된 곳은 마를리 홀이었다. 루브르의 상징과도 같은 유리 피라미드 건축물 아래, 박물관 안에서도 가장 아름답기로 명성이 자자한 지점이다. 때문에 이미 루브르가 패션쇼장이 된 건 처음이 아님에도(2013 페라가모 리조트 컬렉션. 120미터 길이의 복도로만 이루어진 드농관에서 열렸다), 주요 전시품이 있는 공간에서 열린 건 처음이라는 의미까지 더해져 더욱 이목을 끌었다.

파리 오페라 극장에서 열린 스텔라 매카트니의 2017 가을겨울 컬렉션 무대. 모델들이 함께 나와 지난해 숨진 조지 마이클의 '믿음(faith)'을 함께 불렀다.

파리 오페라 극장에서 열린 스텔라 매카트니의 2017 가을겨울 컬렉션 무대. 모델들이 함께 나와 지난해 숨진 조지 마이클의 '믿음(faith)'을 함께 불렀다.

따지고 보면 파리는 역사 깊은 랜드마크를 패션쇼장으로 기꺼이 내놓는데 익숙한 도시다. 샤넬은 전시장 그랑 팔레(샤넬), 디올은 로댕 갤러리에서 연속적으로 컬렉션을 벌여오고 있다. 또 로에베는 유네스코 본부, 스텔라 매카트니는 오페라 극장을 일찌감치 점찍었다. 한때는 파리 국립 천문대(발렌시아가), 뤽상브르 공원(에르메스), 성프란체스코 수도원(몽클레르)에서도 런웨이가 펼쳐졌다.

다른 패션도시들은 어떨까. 파리만큼은 아니라도 비슷한 예는 많다. 런던에선 지난해 구찌가 ‘영국에 보내는 연애편지’ 같은 장소로 웨스트민스터 수도원 화랑을 점찍으며 쇼를 펼쳤고, 크리스토퍼 케인은 2014년 ‘패션은 예술이다’라는 기치아래 테이트 모던 갤러리에서 컬렉션을 열었다. 뉴욕의 경우 휘트니 뮤지엄(토리 버치), 하이라인 파크(코치) 등이 새로운 캣워크 장소로 등극했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도시의 랜드마크는 4대 도시로 한정되는 기성복 컬렉션을 벗어나면 더욱 빛을 발한다. 루이비통은 2016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대표 건축물인 니테로이 현대미술관에서 크루즈 컬렉션을, 샤넬은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2015/2016)와 쿠바 아바나의 프라도 거리(2016/2017)에서 크루즈 컬렉션을 펼쳐 그 자체만으로도 뉴스를 만들었다. 또 발렌티노는 로마 스페인 계단 근처 미냐넬리 광장에서 오트 쿠튀르 컬렉션을 열어 도시 명소가 패션쇼의 배경이 되는 ‘그림’을 만들어냈다.

"패션쇼장은 공간의 스토리텔링 받쳐줘야"

뉴욕 하이라인 파크에서 열린 코치의 2016 봄여름 컬렉션. 

뉴욕 하이라인 파크에서 열린 코치의 2016 봄여름 컬렉션.

패션하우스가 도시 랜드마크를 굳이 패션쇼장으로 이용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예상외로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도 있다. 디자이너 스텔라 매카트니의 경우 파리 오페라 하우스를 택한 이유에 대해 “클로에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시절, 첫 쇼를 진행한 곳이라 디자이너로서 큰 의미가 있어서”라는 답을 들었다. 로에베는 디자이너 개인과 브랜드의 정체성이 결합된 특수한 상황을 고려해 패션쇼 장소를 택했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조나단 앤더슨은 “로에베는 파리에서 쇼를 하지만 스페인 브랜드이고, 나는 아일랜드 사람이며, 현재 런던에서 일을 하고 있다”면서 “무인지대 같으면서도 또한 모두를 위한 공간인 유네스코 본부를 패션쇼장으로 꼽은 이유”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이 같은 장소 선택이 그간 수없이 회자된 ‘기발한 패션쇼장’과는 다르게 해석돼야 한다는 점이다. 막대한 예산과 허가의 문제만이 아니다. 일단 장소와 브랜드가 함께 도시를 홍보한다는 파트너 개념이 바탕에 깔려 있다. 실제로 샤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칼 라거펠트는 2005년부터 그랑 팔레를 패션쇼장으로 택한 이유를 이렇게 밝힌 적이 있다. “특별한 공간이기 때문에 뭔가 대단한 걸 만들어내기 좋다. 뭣보다 파리의 심장부가 바로 여기 아닌가. 손님들이 너무 멀리서 찾아오지 않도록 예의를 갖추기에 최적의 장소다.” 루이비통 역시 비슷하다. 마이클 버크 루이비통 CEO는 파이낸셜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루브르 박물관에서의 패션쇼가 테러 위협으로 침체된 파리를 문화 수도로서 되살릴 대담한 시도”라고 밝혔다. 그의 의견에 화답하듯 르몽드에서는 “파리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패션 수도이며, 루브르 내에서 개최된 루이비통 패션쇼가 이를 입증했다”고 보도했다.

이 같은 ‘장소-브랜드-언론’의 3박자는 유서 깊은 패션하우스만의 특권이기도 하다. 헤리티지가 있는 장소가 전혀 어색하지 않을 만큼 무게감 있는 역사를 스스로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김홍기 패션 큐레이터는 “공간이 갖고 있는 기억, 또 장소 하나로 새로운 이야기 거리를 만들어내는 데 익숙한 브랜드만이 가능한 일”이라고 말한다. 가령 19세기까지만 해도 공간 절반이 공예를 위한 공간이었던 루브르 박물관에서 패션쇼를 함으로써 예술과 상품이 그리 멀리 있지 않음을 시사하고 있다. 관객 입장에서도 왕실 트렁크를 만들며 시작한 브랜드가 왕궁에서 쇼를 하는 게 어색할 이유도 없다. 김 큐레이터는 “스페이스(space)가 중립적 용어라면, 도시 랜드마크인 패션쇼장은 주관적·감정적 ‘플레이스(place)’ 관점에서 봐야 한다”고 말한다.

로마 트레비분수 앞에서 펼쳐진 펜디 90주년 패션쇼.

로마 트레비분수 앞에서 펼쳐진 펜디 90주년 패션쇼.

헤리티지를 내세우는 브랜드가 도시의 문화유산 보존·복원 사업을 후원하고, 다시 그곳에서 패션쇼를 여는 일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하면 쉽다. 브랜드와 장소의 역사성을 결합시키는 시도다. 일례로 펜디는 지난해 로마 트레비 분수 복원 사업에 250만 유로(약 30억 3800만원)를 기부하고, 분수에 무대를 만들어 브랜드 90주년 컬렉션을 열었다. 로마에 아뜰리에를 두고 있는 펜디 측은 “이 도시는 우리의 창조적 헤리티지의 일부”라며 “마치 야외 박물관처럼 모든 것에서 영감을 얻을 수 있는 곳”이라는 설명을 더했다.

최근 사례만 봐도 브랜드와 장소의 연관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구찌가 올해 6월 그리스 대표 문화유산인 아크로폴리스 언덕에서 15분 간 패션쇼를 하는 대가로 거액을 주겠다는 제안을 했지만 퇴짜를 맞은 것. 예산에 쪼들리는 상황임에도 그리스 국립고고학위원회(KAS)는 성명을 통해 “세계 문화유산의 상징인 이 특별한 장소는 그런 행사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이유를 밝혔다.

역사성 어울리는 브랜드·장소 찾기 국내선 힘들어

서울 DDP에서 열린 샤넬 2015/16 크루즈 컬렉션에서 관객들에게 인사하는 칼 라거펠트.  

서울 DDP에서 열린 샤넬 2015/16 크루즈 컬렉션에서 관객들에게 인사하는 칼 라거펠트.

해외와 달리 국내에선 패션이 도시 랜드마크로 입성하는 예가 거의 드물다. 매해 두 번씩 열리는 서울패션위크는 대부분 DDP와 호텔·카페 등에서 열린다. 선례를 굳이 찾자면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과천관) 전시장에서 문영희 디자이너가 패션쇼를 열고, 아트숍에서 협업 제품까지 만든 일이 손꼽힐 정도다. 이유가 뭘까. 문화예술 마케팅 업체 ‘오운’의 정진아 대표는 “국내에서 공공장소를 내어줄만한 패션 브랜드를 찾기가 쉽지 않다”고 말한다. 문 디자이너의 경우 1990년대 초반 파리로 진출해 프랑스 정부로부터 국가공로훈장까지 받은 디자이너였다는 점이 특별히 고려된 것. 당시 의상도 단색화 전시에 영감을 받아 제작됐다. 한마디로 장소와 맥락이 맞는 디자이너·브랜드가 그만큼 없다는 이야기다.

더 큰 요인도 있다. 아직까지 패션을 하나의 문화로 인정하는 대중의 인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유럽처럼 오래 전부터 상류층 문화가 당연시되고, 이들이 착용하는 옷이나 보석이 하나의 예술품으로까지 취급되는 것과 달리 국내에서는 여전히 하이엔드 패션을 ‘그들만의 과시 수단’ ‘욕망하는 대상’ 정도로 여긴다. 계원예술대 권정민 교수(전시디자인과)는 “공공장소에서 패션쇼를 열다 보면 특혜성·상업성 시비가 나올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패션쇼는 아니지만 지난해 국립중앙박물관은 프랑스 럭셔리 업체들의 보석이 전시되는 ‘프랑스장식미술전’을 "상업성이 강하다"는 이유로 개최를 반대했다.

발렌티노의 2015 가을겨울 오트 쿠튀르 컬렉션이 열렸던 로마 미냐넬리 광장의 당시 모습.

발렌티노의 2015 가을겨울 오트 쿠튀르 컬렉션이 열렸던 로마 미냐넬리 광장의 당시 모습.

하지만 이미 도시 랜드마크가 상업적 행사에 문호를 여는 건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되고 있다. 그 아무리 도시 관광명소라도 입장권 수익만으로 재정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아서다. 입장료 수입조차 없는 로마 스페인 계단, 트레비 분수 같은 곳은 이탈리아 정부 문화재 예산이 감축되자 로마 시가 기업들의 후원 유치에 적극적이다. 뉴욕도 시립도서관이나 하이라인 파크 등이 가장 대관 유치에 열을 올린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일부에서는 차라리 브랜드와 끈끈한 관계를 맺으면서 그 수익으로 더 나은 전시·행사·복원사업 등을 하는 게 ‘공익성’에 부합한다는 논리까지 나온다. 경희대 박신의 교수(문화예술경영학과)는 “공공성의 기준을 어디까지 넓히느냐에 따라 브랜드와의 결탁이냐, 문화혼성시대의 새로운 접근이냐로 시각이 갈린다”고 분석한다. 도시 랜드마크의 역할과 기능을 재고해 볼 시점이라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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