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부바부터 삽질까지···北 김정은의 사진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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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의 사진은 그 자체로 정치다. 북한의 만33세 지도자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은 이 점을 누구보다 잘 안다. 적어도 그가 지난 19일 공개한 ‘어부바 사진’을 보면 그렇다. 

'1호 사진' 공식 깬 김정은식 사진의 정치학…허리 굽혀 삽질하는 모습까지 공개하며 '애민 지도자' 부각

김정은이 지난 19일 미사일 엔진 분출 시험 뒤 관계자를 업어주고 있는 모습. [조선중앙TV 캡쳐]

김정은이 지난 19일 미사일 엔진 분출 시험 뒤 관계자를 업어주고 있는 모습. [조선중앙TV 캡쳐]

김정은 위원장이 지난 19일 로켓 엔진 지상분출 시험을 했다며 공개한 관영 조선중앙TV 영상에서 캡쳐한 사진이다. 분출 실험 책임자로 보이는 나이 지긋한 담당자를 등에 업고 행여 그가 떨어질세라 손까지 꽉 잡아주며 환히 웃고 있다. 그런 김정은의 뒤로는 두 팔을 높이 올려 환호와 박수를 보내는 이들이 서있다. 김정은이 노린 ‘애민(愛民) 지도자’ 이미지다. 

흥미로운 건 북한 당국이 이 사진을 노동신문에는 별도로 공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매체 특성상 텔레비전에 스치듯 지나가는 영상과는 달리, 인쇄 매체인 신문에 이 사진이 게재되는 것은 최고지도자의 ‘존엄’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 노동당 선전선동부는 대신 김정은이 분출 시험 관계자들의 손을 꼭 잡아주며 웃는 사진을 노동신문 게재용으로 골랐다(아래 사진 참조) 선전선동부엔 김정은의 여동생이자 핵심 실세로 꼽히는 김여정이 깊숙하게 개입하는 것으로 통일부는 판단하고 있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이 지난 19일 공개한 김정은의 사진. 어부바 사진 대신 관계자의 손을 꼭 쥔 사진을 게재했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이 지난 19일 공개한 김정은의 사진. 어부바 사진 대신 관계자의 손을 꼭 쥔 사진을 게재했다.

김정은은 아버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한 지난 2011년 12월 이후, 사진 정치를 부쩍 강화해왔다. 북한 인민 앞에 직접 나서서 공개활동을 하는 것을 꺼린 아버지와는 180도 다른 행보다. 김정일은 김일성의 육성 신년사 전통도 깨고 서면으로만 신년사를 냈던 은둔의 지도자였다. 그러나 젊은 지도자 김정은은 과감하다. 북한에서 ‘1호 사진’이라고 불리는 최고지도자와의 기념 사진 공식도 깼다. ‘최고지도자=맨 앞 줄 정중앙’이라는 공식을 주로 갖고 가되, 필요할 경우엔 주민들 사이로 섞인다. ‘숨은 김정은 찾기’식의 1호 사진이 난무한다. 주민들과 어깨동무를 하거나 팔짱을 끼는 건 이제 뉴스 거리도 되지 않는다. 아래 사진에서 김정은을 찾아보자. 1분 안에 성공하는 이는 최고의 북한 전문가라 할 만 하다.

김정은은 기념사진에서도 '최고지도자=맨 앞줄 정 중앙'이라는 공식을 깼다. [노동신문 캡쳐]

김정은은 기념사진에서도 '최고지도자=맨 앞줄 정 중앙'이라는 공식을 깼다. [노동신문 캡쳐]

김정은이 깬 사진 정치의 공식은 또 있다. 금기로 통했던 최고지도자의 뒷모습과, 부인과 다정한 포즈를 취한 모습, 그리고 무릎을 꿇는 등 ‘저자세’를 보인 앵글 등이다. 아래 사진을 보자. 

북한은 김정은 시대 들어 최고지도자의 뒷모습도 사진 정치의 새로운 앵글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노동신문 캡처]

북한은 김정은 시대 들어 최고지도자의 뒷모습도 사진 정치의 새로운 앵글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노동신문 캡처]

북한이 지난 6일 동창리에서 중장거리 미사일 발사실험에 성공했다고 주장하면서 공개한 사진이다. 김정은의 뒷모습이 사진 프레임을 가득 채우고 있다. 좌측 상단엔 나뭇가지가 멋드러지게 배치돼 있고, 저 멀리 창공을 가르는 중장거리 미사일 4기가 화염을 뿜고 있다. 

외교안보 당국자는 이 사진을 보며 “선전선동부에서 꽤나 공을 들인 앵글 같다”는 평가를 내놨다. 이 당국자는 “김일성이나 김정일 때라면 최고지도자의 뒷모습은 금기 중 금기였다”며 “그러나 김정은은 이 금기를 과감히 깼다”고 말했다.

김정은과 부인 이설주의 다정한 커플사진 역시 새로운 사진 정치학 중 하나다. 이설주가 김정은과 팔짱을 끼고 활짝 웃는 모습은 매체에 다양하게 등장해왔다. 지난 3일 만경대 혁명학원을 찾아 아이들을 만나고 식수를 하는 장면에서도 이설주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미소를 지은채 남편과 팔짱을 끼고 있었다(아래 사진). 남편 김정은은 호탕하게 입을 벌리고 웃는 모습이다. 

김정은과 부인 이설주의 다정한 모습. [노동신문 캡처]

김정은과 부인 이설주의 다정한 모습. [노동신문 캡처]

식수를 하는 장면 역시 김정은식 사진 정치의 단면을 잘 드러낸다. 김정은이 허리를 무려 약 75도로 굽혀 ‘삽질’을 하는 모습이 나오기 때문이다(아래 사진). 

김정은이 허리를 굽혀 식수를 하고 있다. [노동신문 캡처]

김정은이 허리를 굽혀 식수를 하고 있다. [노동신문 캡처]

전수진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사진=노동신문ㆍ조선중앙통신ㆍ조선중앙TV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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