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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걸음씩 제단에서 내려오듯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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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3호 27면

알프레트 브렌델 고별공연 음반의 뒷 표지.

알프레트 브렌델 고별공연 음반의 뒷 표지.

알프레트 브렌델(86)이 무대를 떠난 지도 10년이 되어 간다. 미안한 말이지만 현역시절에도 그는 나의 피아니스트 선발투수진에 들지는 못했다. 호로비츠나 리히터 등 워낙 출중한 선배들이 즐비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는 나와 동시대를 산 최고의 피아니스트였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 그의 에세이집 『알프레트 브렌델, 아름다운 불협음계』를 펼쳐놓고 그의 고별공연 음반을 듣는다. 생각해보니 브렌델이야말로 언제 왔다 언제 사라지는지 모르는 봄날 같은 피아니스트였다.

[WITH 樂] #알프레트 브렌델 고별공연

그의 타건은 한걸음 한걸음 사색하며 숲 길을 걷는 사람의 발자국 같다. 브렌델의 적들은 그의 해석을 “열기가 없다”거나 “현학적”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청중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화려한 쇼나 강력한 타건, 물아일체의 열기만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연주자가 얼마나 곡을 깊게 이해하고 이를 토대로 작품 전체를 일관성 있게 다루느냐다. 현역시절 브렌델은 소신 있고 지적인 해석으로 보편적 동의를 이끌어 냈다.

2008년 고별 공연에서 브렌델은 60년 연주 인생의 마지막을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로 한정했다. 그에게 가장 비중이 높았던 작곡가들에 대한 헌정 음반과도 같은 의미다. 첫 번째 곡은 모차르트의 9번 협주곡 ‘주놈(Jeunehomme)’이다. 빈 필하모닉과 노장 찰스 매케라스가 함께 했다. 음악학자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주놈’ 협주곡을 ‘모차르트의 에로이카’라고 말했다. 모차르트 음악에서의 혁신적 위치를 강조한 말이다. 브렌델 역시 한 인터뷰에서 이 곡을 두고 뒤에 나타날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선취한 곡이라고 말했다.

피아니스트들은 나이가 들면 과도한 힘을 요구하는 낭만파곡들로부터 거리를 두는 게 일반적이다. 그리고 이즈음 모차르트가 가진 미묘함을 다시 읽어내는 작업을 시도한다. 말년의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루돌프 제르킨이 대표적이다. 브렌델 역시 노후에 모차르트를 되짚어본다. 그가 그려낸 모차르트는 명랑한 천재성에 가려진 진지한 모차르트였다. 마지막 공연 역시 그 연장선 속에 있다.

‘주놈’의 1악장은 고전주의 피아노협주곡으로서는 독특하다. 시작과 동시에 짧은 피아노 주제가 시작된다. 이런 식으로 시작되는 곡으로는 베토벤 피아노협주곡 4번이 있다. 1악장에서 브렌델의 왼손과 오른손의 대화는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나긋하다. 이제 c단조의 아름다운 2악장에 들어선다. 어떤 음악학자는 2악장을 “모차르트 자신의 내면과의 대화”라고 해석했다.

말년의 연주자에게 자기와의 대화는 어떤 방식이어야 할까? 브렌델은 느리고 나지막이 자신과 이야기한다. 스스로의 삶에 감사하고 위로를 보내는 듯 칸타빌레의 중요성 또한 잊지 않는다. 즉 ‘노래하는 것처럼 말하기’가 노장의 손끝에서 빚어지는 대화의 기술이다. 음과 음 사이에 여백을 두는 것 역시 오랜 내공의 결과다. 같이 늙어가는 훌륭한 조력자도 있다. 사전에 충분한 대화가 가능해 작업하기 좋다던 노장 찰스 매케라스는 듬직하다. 음악 인생의 황혼을 바라보는 두 노연주가들이 걸음을 재촉하지 않고 천천히 발을 맞추어 가는 모습이 아름답다. ‘연분홍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 듯’ 그렇게 천천히 말이다.

두 번째 CD에는 베토벤의 피아노소나타 Op. 13과 슈베르트의 유작인 피아노소나타 D. 960, 그리고 앙코르곡들이 실려 있다. 세 번의 전곡 연주를 했을 만큼 베토벤 소나타는 브렌델에게 있어서 절대적이었다. 베토벤의 소나타에서도 브렌델은 진폭을 크게 잡지 않고 담담함을 유지한다. 재기 넘치는 4악장에서 재미가 좀 덜하긴 하다. 솔직히 조금 더듬는 느낌마저 든다. 거장의 마지막 연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를 탓할 사람은 없다. 연주하는 이나 듣는 이나 모두 시간의 무게를 이길 수 없는 유한자임을 알기 때문이다.

슈베르트의 소나타에서는 결승선을 앞둔 마라토너의 심정이 느껴진다. 전성기 시절의 감성과 터치의 드라마틱한 요소는 분명 덜하지만, 녹음 중 들리는 거친 호흡이 마지막 연주의 극적 느낌과 어우러져 꿈틀거리는 감정을 이끌어낸다. 브렌델은 마지막 앙코르로 바흐의 코랄전주곡 BWV. 659를 선택했다. 피아노의 제단에서 물러나는 사제의 마지막 봉헌곡으로 신의 한수다. 한 걸음씩 제단을 내려오며 연주하는 것 같다.

프랑스 작가 미셀 투르니에는 사진집 『뒷모습』에서 “등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말을 했다. CD 재킷에는 무대에서 물러나는 브렌델의 흑백사진이 실려 있다. 그의 등 뒤로 흐르는 바흐의 코랄전주곡은 한 연주자의 삶을 그대로 보여준다. 겨울나무 같아 보이는 뒷모습에서는 어떤 거짓이나 위선도 볼 수 없다. 거장의 마지막 등 뒤로 쏟아지는 박수는 봄 햇살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 같다. 아름다운 퇴장이다.  ●

글 엄상준 TV PD 90empero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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