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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탁이 뭐기에 … 1만원짜리 상품도 있군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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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확산되는 신탁 대중화 

중소기업 퇴직 후 자영업을 하고 있는 이모(55)씨는 지난달 모친상을 치렀다. 슬픔이 컸지만 곧 상속 문제가 현실로 다가왔다. 유언 없이 돌아가신 홀어머니는 수백만원짜리 예·적금 5개를 은행 여러 곳에 남겼다. 이 돈을 인출하자니 형제자매의 위임장과 인감도장이 필요했다. 하지만 평소 불화로 왕래가 없던 누나 두 명은 장례가 끝나자마자 거주하던 외국으로 돌아가 연락이 잘 닿지 않았다.

자산 운용, 세무·상조까지 #상속 분쟁 걱정 덜 수 있어 #과거 자산가들 전유물서 #문턱 낮춘 서비스 속속 선봬 #은행들 새 먹거리로 떠올라

이씨는 “상속 분쟁은 재산이 많은 집 문제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더라”며 “내가 죽을 때는 미리 돈을 믿을 만한 데 맡겨 가족들이 곤란을 겪지 않게 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씨 같은 사람을 위한 은행 상품이 있다. 9일 KEB하나은행이 출시한 ‘가족배려신탁’이다. 상속에 불편을 겪는 수요가 늘고 있다는 점에 착안해 소액이라도 생전에 정한 사람에게 물려줄 수 있게 만들었다. 보통 3억~10억원을 넣어야 했던 기존 상속·증여신탁의 최소 가입금액이 계좌당 500만~5000만원(예치형 기준)으로 대폭 낮아졌다. 월납형 상품도 있다. 최저 가입금액 1만원으로 납입 기간은 가입자가 마음대로 설정할 수 있다.

가족에게 부담을 지우지 않고 깔끔하게 ‘셀프 장례’를 하고 싶은 사람들의 가입 수요를 노렸다. 귀속 권리자(사후 맡긴 돈을 찾아갈 사람)는 상속인은 물론, 종교단체 등 믿을 수 있는 개인이나 기관을 설정할 수도 있다. 배정식 KEB하나은행 신탁부 팀장은 “기존 유언대용신탁 가입자의 32%를 40~50대가 차지할 만큼 일찌감치 상속을 준비하려는 수요가 느는 추세”라며 “가입 시 정한 귀속 권리자는 추후 변경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신탁을 통해 은행과 제휴된 상조 서비스를 받을 수도 있고 세금·채무상환 등 생전 뜻대로 함께 처리된다.

자산가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은행 신탁이 대중화되고 있다. 고령화, 1인 가구 시대에 자신에게 맞는 신탁 서비스를 원하는 소비자들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KB국민은행이 지난해 출시한 ‘펫신탁’도 한 달에 1만원으로 사후 반려동물 부양 걱정을 덜 수 있게끔 설계됐다.

가입자가 월 1만원 이상, 일시금 200만원 이상의 돈을 은행에 맡기고 부양인을 지정해 놓으면 사후 은행이 부양인에게 돈을 지급한다. 만 19세 이상 성인만 가입할 수 있고 납입 한도(1000만원)가 정해져 있지만 반려동물 확산 추세와 함께 가입자가 꾸준히 늘고 있다. 국민은행 관계자는 “최근 문의가 늘어 개로 한정됐던 가입 대상 동물을 고양이까지로 확대했다”고 전했다.

신탁 시장 확대는 은행의 새 먹거리 개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신탁은 일반 대중에게 아직 생소하다. 그동안 시중은행들은 자산규모 10억~50억원대 이상인 VVIP 고객들을 상대로 PB센터에서 신탁을 판매했다. 신탁에 가입하면 금융사가 일정 보수를 떼는데 선취·유지 보수에 최종 집행보수까지 비용이 적지 않다. 일반 증여신탁 기준 최소 가입금액(10억원)을 맡기고 내야 하는 선취 보수(2%)만 2000만원이다.

하지만 최근 영업 환경이 변하고 있다. 당국 규제 완화가 대표적이다. 금융위원회는 올 초 금융개혁 5대 중점과제 중 하나로 국내 신탁업 활성화를 내걸었다. 현재 자본시장법 안에 들어 있는 신탁업법을 따로 떼내 고치고 금융사(은행·보험·증권 등)가 아닌 로펌이나 병원도 해외처럼 신탁을 취급하도록 하는 방안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너도나도 신탁 시장에 뛰어들면 2016년 9월 말 기준 709조원대인 금융권 신탁 규모가 더 커질 전망이다.

파이가 커지고 경쟁이 붙으면 소비자는 좀 더 나은 금융서비스를 받을 기회가 생긴다. 새로 나온 가족배려신탁의 경우 언제든 원하면 중도 해지가 되고 맡긴 돈에 대해서는 은행 정기예금에 준하는 연 1.2%대 이율을 적용한다. 선취·집행 보수는 없고 유지 보수만 연 0.4%를 뗀다.

다만 가입금액이 큰 기존 증여신탁이 갖던 세제 혜택이 없는 건 아쉬운 부분이다.

김진홍 금융위원회 은행과장은 “신탁이 맡길 수 있는 수탁재산의 범위를 늘리고 새로운 신탁에 대해 세제 혜택을 부여하는 방식도 논의 중”이라고 말했다. 김우진 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은행의 신탁업이 활성화되면 소비자가 다양한 금융 상품·서비스를 한곳에서 편리하게 받는 ‘파이낸셜 수퍼마켓’이 구현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심새롬 기자 saero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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