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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노량진의 청춘을 꿈꾸게 하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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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0면

한애란 경제부 기자

한애란경제부 기자

얼마 전 집 근처 노량진에 갔다가 골목을 한 바퀴 돌았다. 뷔페식 고시식당 입구에 길게 늘어선 줄, 곳곳에 내걸린 코인노래방과 인형 뽑기 가게 간판, 두툼한 점퍼 차림으로 건물 뒤편에서 담배를 물고 있는 청년들. 그 골목 어귀에서세움 간판을 하나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아메리카노 900원’. 새로 문을 연, 인테리어가 제법 그럴듯한 커피 가게였다. ‘아메리카노=1000원’은 노량진 고시촌의 오랜 공식이다. 그게 깨질 줄은 몰랐다.

온통 공시생(공무원시험 수험생) 세상인 노량진 고시촌은 갈 때마다 붐비고 늘 낯설다. 마치 서울이 아닌 딴 세상인 듯 거꾸로 가는 이곳의 물가는 반갑기보다는 오히려 씁쓸하기까지 하다. 우리 사회 공무원시험 열풍의 단면이어서다. 국가공무원 9급 시험에 역대 최다 인원인 22만8000여 명이 몰렸다. 경쟁률이 46.5대 1이다. 낮은 진입장벽, 공정한 승부, 최고의 안정성, 저녁이 있는 삶. 젊은이들이 노량진에서 900원짜리 커피를 들이키며 공무원시험에 매달리는 이유는 충분하다. 노량진은 어쩌면 가장 합리적이고 현실적이면서 열심히 사는 청춘들의 집합소다.

‘나는 원하는 커리어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있다(38%)’ 25위, ‘부모세대와 비교하면 나는 현재의 커리어에서 성공할 기회가 있다(51%)’ 24위. 최근 씨티그룹이 전 세계 젊은이 7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25개 도시 중 서울시 청년의 미래 전망에 대한 긍정적 응답 비율은 최하위권이었다. 서울의 청춘들은 가능성과 기회가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고 응답한다. 이들에게 공무원이 아닌 더 큰 꿈을 꾸라고, 도전하라고 독려하는 게 소용이 있을까.

일부 대선주자들이 기본소득제를 들고 나왔다. 재원 문제로 실현 가능성이 떨어지고 복지의 우선순위에서 밀린다는 비판도 일리 있다. 그런데도 관심을 끄는 건 기본소득이 혹시 청춘을 다시 꿈꾸게 할 수 있지 않을까란 기대 때문이다. 청년 기본소득제를 주장하는 이승윤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기본소득은 일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꼭 월급 받는 것만이 일이 아니라 자원봉사도, 원자력 반대 운동도 일이 되는 거지요.”

금전적 보상과 안정적 일자리가 아닌 스스로의 보람과 만족이 직업 선택의 기준이 되는 세상. 기본소득제의 지향점은 상상력을 자극한다. 꿈꾸는 청년에게 용기를 불어넣는 방식이 꼭 기본소득이어야만 하는 건 아닐 것이다. 그러니 진지하게 논의해보자. 그런 대안이 무엇이 있을지를. 다소 황당하다고 치부되는 기본소득제 공약이 우리 사회에 던지는 화두다.

한애란 경제부 기자 aeyan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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