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동의이몽...80년의 두 김씨|"재야와 협의 국민의 뜻 따르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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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87년의 정치흐름은 80년 서울의 봄을 연상하게 한다. 민주당의 두 김씨, 공화문을 재정비하고 나선 김종필씨는 80년 서울의 봄에 등장했던 세 주역이다. 민정당의 노태우 총재가 없다면 87년의 정치에 재등장한 세 금씨의 내일을 향한 모색은 80년 서울의 봄 그대로다.
세 김씨에 있어 지난 7년은 잃어버린 시간일 수 있다. 그들이 80년에 가다만 길을 가고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그들의 선택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야당 권 두 금씨가80년 서울의 봄을 거의 비슷하게 되풀이하고 있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87년 야당은 민주와의 조그만 창을 열었다. 전면에는 민주당이 있었다. 민주당은 김영삼 총재가 이끌었다. 그때 김대중씨는 연금상태에 있었다. 민주화의 창이 열리면서 김대중씨도 연금에서 풀리고 사면·복권이 뒤따랐다. 둘은 협력의 계속을 다짐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둘은 경쟁의 수렁으로 더 깊이 빠져가고 있다.
80년 서울의 봄에도 이 흐름은 같았다. 어느 날 갑자기 10· 26이 왔다. 그때 YH여공사건-총재가처분-의원직제명-부마사태로 연결된 당사자는 김영삼 신민당총재였고 김대중씨는 연금 되어 있었다. 민주화가 시동하면서 연금해제-사면·복권이 뒤따랐고 둘의 경쟁이 시작됐다. 야당의 80년 봄을 회상해 보는 것은 어쩌면 87년의 야당을 보는 것이 될지도 모른다.

<야의 목소리 갈라져>
79년의 10·26사태는 유신체제의 종말을 의미했다. 그러나 유신체제 하에서 묶인 민주인사들에 대한 석방과 사면·복권 등 민주화의 길을 열기까지는 4개월이 넘게 걸렸다. 이 과정까지 야당의 목소리는 하나로 합쳐 있었다. 그러나 날이 가면서 목소리가 차츰 갈라졌고 김대중씨의 사면·복권과 함께 대립은 곧바로 표면화되었다.
그때 김영삼 총재는 김대중씨가 79년의 5·30전당대회 때 신민당 상임고문으로 추대되었으며 사면·복권된 만큼 당연히 상임고문을 수락하고 신민당에 복귀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대중씨는 78년4월 일신상의 사정이라는 이유로 신민당 탈당계를 내고 이철승 체제의 신민당을 떠났었다. 그랬는데 79년의 5·30전당대회 때 신민당 당권경쟁에 개입해 김영삼씨를 도왔고 그 전당대회에서 김 총재의 제청으로 상임고문으로 추대되었다. 그 때 본인이이를 수락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김 총재는 사전에 본인의 의사를 묻지 않고 고문으로 추대했겠느냐고 말했다.
고문직 수락여부는 그때로선 관심거리였다. 김영삼씨 쪽에서 본다면 김대중씨가 신민당에 들어온다면 대통령후보 단일화는 당내문제로 처리할 수 있었고 이 경우 김 총재는 유리한 입장이었다. 김대중씨로선 당연히 그 반대의 입장이었다. 즉 김영삼 체제로 굳어져 있는 신민당에 입당하는 것은 대통령후보의 포기와 연결되는 것으로 비칠 수 있었다.
김대중씨는 사면·복권된 다음날인 80년3월1일 기자회견을 통해 자신의 정치구상을 밝혔다. 김대중씨의 제1성은 이 순간에 있어 나의 1차 적 관심은 민주제도의 차질 없는 재확립이지, 대통령후보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신민당 입당문제에 대해서는 『지금 신민당에 들어가 과열경쟁을 벌인다면 민주주의 소생을 원치 않는 자들에게 어부지리를 안겨줄 것이다. 나의 거취는 재야민주인사들과 협의하고 국민의 뜻에 따라 결정할 것이다. 단 신민당이 국민 모두가 인정하는 공정한 절차에 따라 내가 무엇에 필요한가를 결정해주면 그 결정에 따르겠다』고 했다. 이 말은 신민당이 그를 대통령후보로 추대하면 당에 복귀할 것이라는 뜻으로 해석되었다.
결국 그 봄 김대중씨는 김영삼 총재의 신민당에 입당하지 않고 재야신당을 향해 갔다.
이점에선 둘이 총재와 고문으로 나란히 있는 87년의 상황은 한 발짝 진전된 변화다. 그러나 그때도 오늘도 꼭 닮은 것은 후보의 조건이다.
그 봄 김영삼 총재는 10·26은 신민당이 투쟁을 통해 쟁취한 것이며 당연히 신민당은 민주 세력의구심점이라고 했다. 반면 김대중씨는 유신체제에 참여하지 않고 투쟁해온 재야 측에 민주세력의 정통성이 있다고 했다.
이점은 한쪽이 투쟁을 선비 해온 것을, 다른 한쪽이 더 많은 수난을 당했음을 내세우는 오늘의 논리와 맥락을 같이한다.
그 봄에 둘의 다툼이 외신에서 표면화된 것도 특이하다. 3월1일의 내신기자회견에서도 둘 사이의 어긋남이 보였지만 직접적인 표현은 삼갔다. 그랬는데 바로 그 날 김대중씨와의 회견을 보도한 뉴욕 타임즈는 김대중씨의 김 총재 비판을 인용했다.

<투쟁선도냐 수난이냐>
내용은 김영삼 총재가 10·26사태 후 대통령선거를 겨냥한 전략강화 때문에 정치정세의 주도권을 잡는데 실패했다는 비판이다.
이제 그 봄의 출발로 얘기를 거슬러 가보자.
80년 그 봄엔 모두가 그랬듯이 야당도 아무 준비 없이 10· 26에 마주쳤다. 사태는 민주화의 길을 여는 것으로 보였다. 박대통령이 사라진 이상 유신체제를 지켜나 가기는 불가능 하다는 인식이 모두에게 있었다. 그러나 정치상황은 다소 모호했다.
예를 들어 4·19때는 자유당은 무너졌고 민주당으로 권력이 넘어가는 분명한 흐름이 보였다. 10·26도 그런 흐름으로 보이기는 했지만 4·19당시의 민주당에 비해 그때의 야당은 너무 많이 헝클어져 있었다고 할까.
그때 여당도 야당도 처음 얼마동안 사태의 진상을 알지 못했다. 권력의 중심이던 행정부는 박대통령의 국장기간을 정치의 정지로 설정해 사태변동에 대비할 준비를 할 수 있었다.
야당은 그 기간 사태의 변화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 대로 성명도 내는 등 활동을 했지만 그들의 조속한 개헌요구는 법적 효력을 그대로 유지한 긴급조치9호와 계엄령으로 신문엔 단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다.
그 해 김영삼 신민당총재가 10·26사태를 안 것은 27일 새벽5시쯤이다. 그 시간 미국에 있는 한 친지로부터 연락이 왔다고 했다. 그 날AP통신은 새벽4시쯤 박대통령이 쿠데타로 사망했다는 소문이 있다, 확인할 수 없다고 보도했었다. 미국의 친지는 AP를 인용한 미국내 뉴스를 보고 김 총재에게 연락을 한 듯하다. 그때부터 여러 곳에 확인해서 사태의 윤곽을 파악한 것이 상오6시쯤이라고 했다.
김 총재는 당간부들에게 연락해서그날 낮 대책회의를 열었다. 대책회의라고는 해도 그때는 당이 거의 마비상태였기 때문에 총재단 등 당간부들 가운데 나온 사람도 있고, 안 나온 사람도 있고 그랬다.
의견은 두 갈래로 갈렸다. 한쪽에서는 민주회복의 새벽이 왔다, 당을 빨리 정상화해서 민주시대를 열기 위한 행동을 해야 한다고 했다. 다른 한쪽은 좀더 신중했다. 지금은 누가 실권자인지, 성격이 무엇인지, 앞날이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는 판인데 섣불리 나섰다가는 뜻하지 않은 풍상을 겪을지 모른다고 했다.
야당의 그런 정세판단은 무리도 아니었다. 그때 여당을 포함해 정치권에선 사태의 정확한 진상을 알지 못했다. 여당도 그들의 지위문제, 심지어 국회가 존속될 것인지조차 불확실한 것 같은 위기감에 휩싸여 있었다. 여당이 이렇듯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으니 야당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이 무렵 신민당의 형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당시 신민당은 김영삼 총재가 총재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정운갑 총재권한대행이 총재직을 인수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소속의원들도 국회의원직 사퇴서를 내고있었다. 단적으로 신민당은 단순히 총재단만이 법원의 가처분으로 기능이 정지됐다기보다 신민당전체가 가처분 당해 있는 형편이었다.
그 내면엔 여당의 압력이 있었고 그 압력에 대처하는 내루의 노선의 차이가 맞서 있었다.
신민당이 사고당부가 된 과정을 살펴보자.
79년의 5·30전당대회 때 신민당엔 무려 11개 파벌이 있었다. 이중 5개 파벌이 이철승 연합부대였고 이에 맞선 김영삼계는 김재광계, 그리고 잠재적 김대중계와 연합한 3개 파벌, 그리고 다른 몇 개 군소 파벌이 중간파였다. 5·30 전당대회에서 김영삼씨는 이철승 연합부대를 이겼지만 그것은 원외 대의원들에 힘입었을 뿐 원내는 도리어 소수파였다.
김영삼 체제가 출범한 다음날 비당권파는 성명을 냈다. 『김 총재가 재야세력과 공공연히 손을 잡고 있는 것이 문제다. 그들 재야는 현 체제를 전면부정 하지만 신민당은 현실에 참여해 있는 정당이다. 그런데도 김 총재가 재야와 같은 길을 가려 한다면 우리는 따를 수 없다』는 내용.
그러나 그해 8월 YH여공의 신민당사 농성사건을 계기로 신민당은 정부·여당과 정면충돌했다. 그런 대결 속에서 총재단의 직무를 정지하라는 가처분 신청이 법원에 제기되었다. 가처분신청은 정부가 거들었다고는 하지만 표면상 3명의지구당위원장이 소송을 냈고 그들은 비당권파에 소속돼 있었다.
법원이 가처분을 승인하고 정운갑 전당대회의장을 총재대행으로 지명했을 때 당론은 또 한번 갈렸다.9월17일 정운갑 의장이 비당권파의 지원아래 총재대행을 수락한다고 선언함으로써 내분은 절정에 달했다. 이럴 때 정부· 여당은 다시 압력을 가중했다. 김영삼 총재의 의원직 제명이다.
10월4일 여당은 단독국회를 강행, 제명안을 가결했다. 총재가 의원직을 잃게 되자 신민당 소속의원전원의 의원직 사퇴론이 제기되었다. 여기서 당론은 세 갈래로 갈렸다. 이 때문에 논쟁은 1주일을 끌었다.

<여도 야도 방향 못 잡아>
결국 여론에 밀려 일단 총사퇴로 당론을 결정했다. 신민당의 의원직사퇴서 처리를 놓고 여당에서「선별수리론」 이 나온 것은 이 같은 신민당의 당론분열 탓에 가능했던 구상이다.
확실히 10·26전야의 김영삼 체제는 최악의 상태에 있었다. 부총재들도, 당간부들도 당사에 나오지 않고 있었다. 중앙당 국장 등 요원들은 총재단 가처분 결정에 항의해 재판부 화형식을 했다가 구속되거나 수배되어 당사에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10·26사태가 났을 때 신민당은 그런 형편이었다. 이 사태 후에도 며칠 간 신민당의 공백상태는 계속되었다. 그만큼 사태후의 정세를 신민당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럴 때 정치권의 판단 자료의 하나가 미국의 반응이다. 미국무성의 첫 성명은 이 사태를 악용하려는 어떤 외세에도 대응한다는 구절과 「카터」 대통령이 박대통령의 경제적 업적을 찬양한다는 대목에 역점을 두고 있었다. 요컨대 성명에서 나타난 두 가지는 북한의 남침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 박대통령을 격하시키는 성급한 민주화 요구가 정치혼란을 가져와서도 안 되겠다는 의미로 해석되었다.
그런 혼미 속에서 최초로 나온 것은 김영삼 신민당총재의 성명이다. 성명의 내용은 박대통령의 불의의 서거를 애도한다, 유신체제는 이로써 막 내린 것이며 어떤 일이 있어도 민주발전의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따라서 즉시 개헌논의에 착수, 민주헌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것. 그러나 이 성명은 개헌논의를 금지한 긴급조치9호에 따라 단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아 기록으로는 남아 있지 않다.
정치의 방향을 처음으로 제시한 것은 박대통령의 국장을 치르고 1주일이 지난 11월10일이다. 이날 최규하 대통령권한대행은 시국 특별담화를 통해 유신헌법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에 의한 대통령보궐선거를 헌법이 정한 3개월 내에 실시해 새로운 대통령에게 정부를 이양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새 대통령은 빠른 시일 안에 헌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의사를 담아 유신헌법에 의한 보궐선거는 하지만 유신체제는 사실상 철폐해야 한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이 담화가 나오기 전날 박동진 외무장관은 「글라이스틴」 주한 미대사와 요담했다. 최 대행의 이 같은 발표는 행정부와 공화당말고도 미국 등 우방과도 협의하는 등 거의 완벽한 사전준비를 거쳐 발표되었다.
야당도 이 무렵은 이 같은 정부방침을 알고 있었다. 김영삼 신민당총재는 7일부터 윤보선 전 대통령을 비롯한 민주회복국민연합의 지도자들과 접촉했으며 연금 당해 있는 김대중씨와는 간접으로 연락, 의견을 조정했다. 최 대행의 특별담화가 발표되자 김영삼 신민당총재는 즉시 반대성명을 냈다.
국민은 유신체제를 거부했다, 국민으로부터 거부당한 유신헌법으로 대통령보궐선거를 실시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정부는 위헌사태를 막기 위해 보선이 불가피하다고 하지만 이는 보선실시 시한인 3개월 내에 헌법을 개정하는 것으로 극복할 수 있다, 3개월 내 개헌을 하고 그로부터 2∼3개월 내에 대통령선거를 실시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민주회복국민연합·민주청년협의회·해직교수협의회·자유실천문인협회 등 재야단체도 신민당과 보조를 같이 하는 성명을 냈다. 그러나 이 성명들도 모두 그때는 단 한 줄도 국내신문엔 보도되지 못했다.

<미도 정치혼란 걱정>
그때 신민당과 재야단체는 통대의 대통령보궐선거를 반대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유신체제 거부라는 기본입장을 밝히는데 중점을 둔 것 일뿐 보선반대운동을 강력히 펴겠다는 강한 의지가 담긴 것은 아니었다.
김영삼씨의 그 같은 태도는 신민당의 정비, 구속된 민주인사의 석방과 사면·복권이라는 과제가 더 시급했기 때문이다. 그 무렵 문익환 목사, 함세웅 신부 등을 비롯한 1백여 명의 재야지도자와 학생들이 긴급조치9호 위반으로 구속되어 있었으며 김대중씨를 비롯한 7백 여명이 사면·복권을 받지 않은 한 정치활동을 할 수 없는 입장 이였다.
그러니까 보궐선거를 묵시적으로 양해한 것은 사면· 복권이 되지 아니한 김대중씨에 대한 고려 때문이었다. 김대중씨가 사면·복권이 안된 상태에서 3개월 내의 새 정부 수립을 고집할 경우 이는 한사람을 묶어놓은 가운데 경쟁을 끝내려 한다는 비난을 받을 우려가 많았다.
이 같은 야당 권의 입장은 그로부터 1주일 후인 11월l7일의 김종필·김영삼 여야총재회담에서 확인되었다. 회담은 공화당총재로 취임한 김종필씨가 신민당사를 예방함으로써 이루어졌다. 회담은 30분 남짓 진행되었다.
김종필 총재는 공화당은 최규하 대행이 밝힌 선대통령보궐선거-후개헌이라는 정부 방침에 찬성한다고 했다. 김영삼 총재는 유신헌법이 효력을 지속하는 대통령보궐선거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표시하고 3개월 내 개헌을 이 자리에서 주장했다.
김종필 총재는 3개월 중 이미 20여 일이 지나가 버려 남은 두 달은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새 대통령은 유신헌법에 의한 대통령이기는 해도 개헌과 공정한 선거관리라는 두 가지 임무만을 수행할 것이며 공화당은 후보를 내지 않고 최규하 권한대행이 권한대행이라는 꼬리표를 떼는 것뿐이라고 설명했다.
김영삼 총재는 이에 대해 아무 언급 없이 국회에 개헌특위를 구성, 개헌은 국회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조건을 제시함으로써 보선을 묵시적으로 양해했다. 결국 야심 없는 최규하 과도체제의 승인이었다. 이리하여 최규하 정부가 수립되는 기회가 주어졌고 이것은 80년 봄에 많은 상황변화를 겹쳐 만들어내는 출발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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