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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전영기의 시시각각

우리는 전쟁을 하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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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기
전영기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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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한국당이나 바른정당 사람들한테 미안하다는 말부터 해야겠다. 올해 대선은 본선보다 더불어민주당 예선에서 결판날 것같다. 민주당 경선에서 승리한 사람이 19대 대통령에 오를 가능성이 커 보인다. 정권교체론의 대세가 시간이 흐르면서 눈덩이처럼 딴딴해지기 때문이다.

태극기 세력은 왜 불어났나 #‘박근혜 악의성’은 증명 못해

이와 비슷한 일이 2007년 17대 대선 때도 있었다. 그해 8월, 한나라당 이명박 전 서울시장과 박근혜 전 대표 간 예선전은 12월 대선의 결승전으로 간주됐다. 폐허처럼 변한 노무현 정부의 정권 재창출은 불가능해 보였다. 이·박 지지도의 합이 압도적이어서 다른 당의 주자들은 시시하게 여겨졌다. 그들끼리 엎치락뒤치락 뜨거운 흥행의 묘미가 1년간 이어졌다. 전의를 상실한 대통합민주신당 지지자들은 대선 당일 아예 투표장에 나가지 않았다.

2017년 현재, 대선 무대의 불꽃 튀는 라이벌은 1위 문재인 전 민주당 대표, 2위 안희정 충남지사다. 둘의 지지율 합이 압도적이고 안희정의 무서운 기세가 흥행 열기를 더하고 있다. 지금 이대로라면 보수 유권자층은 인물 빈곤에 절망한 나머지 투표에 대거 불참할 수 있다.

문재인·안희정의 말과 생각과 책임은 그만큼 무거워졌다. 지금까지 민주당이 대변하지 않았던 중도·보수층의 우려와 상실감을 어느 정도까지 감당하겠다는 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다. 노무현이나 이명박·박근혜 정권이 취임 직후 불복세력의 거센 반발로 휘청거린 점을 상기해 보라. 게다가 새 대통령은 대선 이튿날, 당선증(當選證)을 받자마자 바로 업무에 들어간다. 신·구 정권의 완충기인 정권 인수 절차가 이번엔 없다.

유력 대선주자들이 선거과정에서부터 찢어지고 갈라진 민심을 예민하게 의식해야 하는 이유다. 그렇지 않으면 그 부담은 고스란히 새 집권자에게 돌아갈 것이다. 민심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뒤집기도 한다. 박근혜 정치의 비극이 차기 정권 초반에 닥치지 않으리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차기 정권의 안정성이라는 항목에서 통합과 협치를 얘기하는 안희정이 청산과 분노를 외치는 문재인보다 조금 나아 보인다. 최근 ‘선의(善意)와 분노’ 논쟁이 그 시험대였다. 안희정은 “박근혜 대통령도 선한 의지로 국민을 위해 좋은 정치를 하려고 했다. 법과 제도를 따르지 않아 문제가 발생했다”(19일 부산대 즉문즉답 행사)고 말했다. 이를 전해들은 문재인은 “안 지사의 말엔 분노가 빠졌다. 불의에 대한 분노 없이 어떻게 정의를 바로 세우겠나”라고 반박한다. 안은 “국가 지도자의 분노는 피바람을 부른다”고 했다. 문이 다시 “분노는 정의의 출발”이라고 하자 안은 “정의의 마무리는 사랑”이라고 맞받았다.

이 논쟁 뒤에 안희정은 자기 소신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받은 사람들에게 사과드린다고 했다. 박근혜를 악의 꽃으로 신념화한 사람들이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안희정의 정신이 잘못됐다고 보지 않는다.

모든 시민을 선의로 대하고 불법을 저지른 만큼 징벌한다는 안희정 생각은 찢어진 민심을 꿰매는 데 적합한 정치관이다. 대통령 탄핵정국은 ‘박근혜의 불법성’을 심판하는 것에서 멈춰야 한다. ‘박근혜의 악의성’은 증명할 수 없다. 문재인의 분노도 박근혜가 저지른 불법성을 응징하는 데까지 사용해야 적당하다. 박근혜의 존재 전체를 부정하거나 소멸시키려 한다면 그의 선의를 믿는 세력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 서울광장에 태극기 인파가 갑자기 불어난 이유는 뭘까. 현장에선 “박근혜의 불법은 인정하겠는데 그를 마녀사냥하듯 악의 화신으로 몰아가는 건 참을 수 없다”는 얘기를 많이 들을 수 있다. 정의를 세우기 위한 분노라도 악의(惡意)를 파헤치려는 건 곤란하다. 분노가 증오를 낳고 증오가 더 큰 증오를 낳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정치의 파탄이다. 정치가 없는 곳에선 선거도 없다. 그래선 안 된다. 우리는 전쟁을 하는 게 아니다.

안희정은 부산대 행사에서 선의론의 마지막을 이렇게 정리했다. “누구를 반대하려는 정치로는 미래가 열리지 않는다. 누구를 비난하는 존재로 서 있으면 제 인생이 너무 아깝다.”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