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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히딩크'가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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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
이정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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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재벌 총수가 구속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전 그룹이 총수 석방에만 매달리게 된다. 경영은 뒷전이다. 실적도 저리 가라다. 청와대 동향에 온 촉각을 곤두세운다. 정치권과 시민단체, 언론 눈치보기도 극심해진다. 광복절·성탄절엔 총수 사면을 위한 총력전이 펼쳐진다. 24시간이 모자란다. 홍보맨 J씨는 “행여 총수에 누가 될 일은 절대 삼간다. 때리면 때리는 대로 맞는다. 달라면 달라는 대로 준다”며 “한마디로 동네북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CJ·SK·한화가 좋은 예다.

총수 부재 대신할 방패 #꼭 있어야 동네북 안 돼

삼성이 위기다. 공신력 있는 미국 여론조사 기관의 기업 평판지수가 지난해 7위에서 올해 49위로 급락한 것은 되레 작은 일이다. 예정됐던 개혁 조치는 좀 미뤄져도 된다. 하지만 삼성이 동네북이 되는 일은 막아야 한다. 야당은 벌써 백혈병 청문회로 삼성을 옥죄고 있다. 온갖 민원이 몰려들 것이다. 임원들은 “그러다 당신네 총수 영영 감방에서 못 나올 것”이란 협박을 걸핏하면 듣게 될 것이다. 구속은 이재용 부회장 개인으로 끝나야 한다. 삼성까지 구속돼선 안 된다. 어떤 방법이 있나.

이재용은 언제쯤 풀려날 것인가. 그에 따라 대응이 달라질 수 있다. 합리적 가정을 해 보자. 시간은 그에게 불리하다. 7개월 내에 대법원 판결까지 마치도록 한 특검 규정에 따라 5월 말이면 ‘이재용 뇌물죄’의 1심 판결이 난다. 탄핵심판이 인용됐다면 새 대통령이 선출돼 있을 시기다. 탄핵과 대선의 후유증이 나라를 휩쓸고 있을 것이다. 수갑 찬 전직 대통령은 통합에 도움이 안 된다. 박근혜를 풀어주는 ‘용서와 화합’의 결단이 화두로 떠오를 것이다.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이 됐다면 딱 여기까지다. 한발 더 나가 이 부회장까지 “봐주자”고 하기는 어렵다. 이미 4대 그룹을 콕 찍어 손보겠다고 다짐한 문재인이다. 친노와 민주노총이란 문재인의 ‘정치적 자산’은 이재용의 무죄·사면을 용납할 여유나 공간이 없다.

탄핵이 기각됐다면? 격렬한 촛불이 나라를 휩쓸 것이다. 민란, 계엄령이 헛소리가 아닐 수 있다. 박근혜는 바로 식물 대통령이 될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박근혜 정부가 이재용을 봐줄 수는 없다. 이래저래 삼성의 총수 공백이 길어질 수 있다.

작은 가능성이라면 안희정 충남지사다. 그는 이명박·박근혜 정부 것이라도 좋은 유산은 안고 가자는 쪽이다. 그런 의지를 실현할 힘, ‘노무현의 동지’라는 정치적 자산도 있다. 그는 재벌 개혁과 총수의 인신 구속은 별개로 봤다. ‘안희정 대통령’은 이재용에겐 가장 좋은 선택지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안희정이 당내 허들을 뛰어넘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이럴 때 합리적 선택은 뭔가. ‘삼성의 히딩크’가 답이 될 수 있다. CJ는 손경식으로 비상체제를 꾸렸다. 사실상 내부 출신이다. 좋은 선택이었지만 한계가 뚜렷했다. 이번 최순실 국정 농단 청문회에서 드러났듯 외압에 취약했다. 총수에 대한 협박이나 민원 창구로 활용되기도 했다.

그러니 아예 외국인 사령탑을 앉히는 것이다. 트럼프를 겨냥한 미국 정보기술(IT)계 거물도 좋고, 중국인 CEO도 좋다. 기업 기밀 유출이 문제 될 수 있겠지만, 삼성의 패망보다는 낫다. 소프트뱅크의 손정의 회장은 한창 잘나갈 때 구글의 니케시 아로라를 영입해 전권을 맡겼다. (비록 결과는 별로였지만) 승부사는 결단의 호흡을 놓치지 않는다.

이재용은 청문회에서 “저보다 잘할 사람, 누구라도 영입하겠다”고 했다. 그는 글로벌 인맥이 단단하다. 마크 저커버그(페이스북 CEO),팀 쿡(애플 CEO), 조 케저(지멘스 회장), 사티아 나델라(마이크로소프트 CEO) 등과 친분이 있다. 적임자를 찾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삼성의 히딩크’는 일석삼조다. 삼성이 동네북이 되는 것을 막아줄 것이다. ‘호칭 바꾸기’류의 시늉 내기가 아니라 진짜 삼성 개혁의 주춧돌이 될 수 있다. 가신 그룹 중심의 수직적이고 폐쇄적인 의사결정 구조도 확 바꿀 수 있다. 총수 구속으로 깨먹은 수조~수십조원 가치의 이미지 손실을 만회하는 건 덤이다.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