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남, 외교여권 소지자라 부검 안돼? 기본도 모르는 北 궤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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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23일 ‘조선법률가위원회 대변인 담화’를 내고 말레이시아 정부의 김정남 암살사건 수사가 국제법을 위반했다고 수차례 비난했다. 하지만 실제론 국제법상 근거가 없는 궤변이었다.

빈협약에 규정 없고 '치외법권'은 100년 전 사라진 개념

담화는 “우리 대사관에서는 심장쇼크에 의한 사망으로 결론된 것만큼 부검을 할 필요가 없으며 더우기 사망자가 외교려권(외교여권)소지자로서 윈협약에 따라 치외법권 대상이므로 절대로 부검을 할수없다는것을 명백히 밝히였다. 그러나 말레이시아 측은 우리의 정당한 요구와 국제법을 무시하고 우리와의 그 어떤 합의나 립회(입회)도 없이 시신부검을 강행하였다”고 밝혔다. 여기서 북한이 언급한 ‘윈협약’은 1961년 체결된 ‘외교관계에 관한 빈 협약’이다.

빈협약 29조는 “외교관(the person of diplomatic agent)의 신체는 불가침”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1조 e항은 외교관에 대해 “공관장이나 공관의 외교직원”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외교여권 소지자에 대한 규정은 없다. 외교여권은 각국의 국내법 규정에 따라 국회의원이나 공기업 임직원에게도 줄 수 있는 것으로, 빈 협약과는 무관하다. 외교여권 소지자가 곧 외교권으로서의 권리를 누리는 건 아니란 뜻이다.

북한이 쓴 치외법권이란 표현 자체도 맞지 않다. 외교부 당국자는 “치외법권은 19세기 때나 쓰던 용어다. 외교관이 일반 국민 위에 있는 것처럼 비춰질 수 있어서 현대국제법에선 아예 이 개념을 삭제했다”고 설명했다.

북한은 말레이시아가 시신을 넘기지 않고 있는 데 대해 “말레이시아 측이 국제법과 인륜 도덕은 안중에도 없이 시신이관 문제를 정치화하여 그 어떤 불순한 목적을 이루어보려 한다는것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외국인의 시신 문제에 대해선 국제법 규정 자체가 없다. 세계 각국은 국내법에 따라 외국인 살인사건에 대한 사법관할권을 행사하고 있다.

담화가 “17일 말레이시아경찰은 현지 우리 대사관에 알리지도 않고 말레이시아에서 일하고있는 우리 공민의 살림집에 불의에 들이닥쳐 무작정 그를 체포했다”고 비난한 것도 모순이다. 외국인 체포시 사전에 해당국에 알려야 할 의무는 국제법상은 물론 국제관행상으로도 없기 때문이다. 통상적으로 체포가 이뤄진 이후 피의자에게 “당신에게는 영사 조력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고지하곤 한다. 양국 간에 영사협약이 맺어져 있을 경우 체포 사실을 특정 제한 시간 내에 상대국에 알려야 하지만, 이 역시 사후적인 통보일 뿐 사전에 미리 알릴 필요는 없다.

외교가 소식통은 “법률가위원회 명의로 법률 용어까지 쓰면서 여러 주장을 했지만 실제 살펴보면 근거가 미약하다. 북한 역시 이를 알기에 외교관이 아니라 외교여권 소지자라고 표현하는 등 교묘하게 담화를 작성한 것 같다”고 지적했다.

유지혜 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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